1일 서울 광진경찰서에 따르면 이모(48) 씨는 지난달 5일 오전 9시경 낯선 남자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 남자는 “○○ 군의 아버지가 맞느냐. 아들을 데리고 있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걸려 온 두 번째 전화에서는 “아빠 무서워. 살려줘”라는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범인은 이때부터 수시로 전화를 걸어 “돈을 준비해라” “은행으로 가라” “계좌로 입금하라”고 요구했다. 아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던 이 씨는 경찰에 신고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범인의 지시에 따랐다.
다급한 이 씨의 모습이 광진경찰서 광나루지구대 소속 고현정(30) 경장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오전 11시경. 전날 야간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던 고 경장은 뭔가 일이 있음을 직감하고 서울 강동구 명일동의 한 은행 현금출금기 쪽으로 걸어가는 이 씨를 쫓아갔다.
범인과 통화 중이던 이 씨는 “입금하는 대로 아들 목소리를 듣게 해 달라”고 했고 이를 엿들은 고 경장은 납치사건임을 눈치 챘다.
고 경장은 통화 중인 이 씨에게 “경찰입니다. 납치전화를 받으셨나요?”라는 메모를 건넸다. 이 씨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 경장은 다시 “시간을 최대한 끌어 보라”는 메모를 보여 주며 이 씨에게 아들의 이름과 학교를 물었다. 고 경장은 이 씨가 떨리는 손으로 적어 준 아들의 인적사항을 갖고 학교에 연락해 이 씨 아들이 수업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고 경장은 “이 씨 아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입금을 멈추라’고 외쳤지만, 이 씨가 이미 500만 원 이체 확인 버튼을 누른 뒤였다”며 “그러나 이 씨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계좌번호를 잘못 입력해 다행히 송금이 되지 않았다”고 상황을 전했다.
이 사연은 이 씨가 감사 편지를 경찰서에 보내 알려졌다. 이 씨는 “근무시간도 아니었는데 공포 속에 떨던 사람을 구해 준 고 경장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정혜진 기자 hye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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