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림역을 지날 때쯤 노약자석에 앉아 있던 한 노인이 자신의 가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박 씨는 곤혹스러웠다. 들고 있던 가방으로 가슴을 가렸다. 노인의 시선은 이내 아랫부분으로 옮겨졌다.
박 씨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즉시 옆 칸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노인은 끈질겼다. 박 씨를 따라 칸을 옮긴 것이다. 더구나 더 대담하게 나왔다. 노인은 박 씨 뒤로 다가가 자신의 몸을 박 씨에게 밀착시켰다. 너무 놀라고 두려웠던 박 씨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를 서둘러 벗어나려 했다. 피하는 과정에서 뒤에 있던 노인과 몸이 부딪혔다. 그러자 노인은 “가만히 있는 사람을 왜 때리느냐. 너는 예의도 모르냐”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박 씨는 같은 칸에 타고 있던 아주머니들이 말리는 틈을 타 경찰에 신고했다. 박 씨는 “너무 두렵고 억울했다”고 하소연했다.
“한동안 자다가도 경기를 일으켰어요. 당시 충격이 너무 컸나 봐요. 지금도 지하철을 타는 게 두렵고, 타고나서도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리게 돼요. 혹시 그런 노인들이 있지 않나 해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말 화나고 분하네요.”
#사례2= 중학교 3학년인 차미진 양도 얼마 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차 양은 3호선 지하철을 타고 귀가 중이었다. 퇴근 시간이라 전철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전철이 교대역을 지났을 때쯤 뒤에 서 있던 누군가가 자신의 다리를 건드리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40대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보였다. 차 양은 처음엔 전철이 흔들려서 중심을 잡지 못해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남자의 행동이 이상했다. 점점 더 바짝 달라붙더니 자신의 신체 일부를 쓰다듬는 것이다. 차 양은 “당시의 수치스런 기억이 떠오를 때면 정말 미칠 것 같다”고 울먹였다.
“다음 역에서 내릴 때까지 정말 무서워서 혼났어요. 너무 떨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소리를 지르려고 해도 입도 잘 떨어지지 않고….”
#사례3= 가정주부 이경희(37·서울 강북구) 씨는 최근 지하철에서 노숙자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사당역에서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노숙자가 탔다. 낮 시간이라 빈자리가 많았다. 그는 전철 안을 스윽 둘러본 뒤 이 씨 맞은편에 앉았다. 한동안 이 씨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갑자기 이 씨에게 덤벼들었다. 다짜고짜 이 씨 몸을 쓰다듬었다. 이 씨는 경악했다. 전철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같은 칸에 앉아 있던 청년이 노숙자의 행동을 제지했다. 노숙자는 다음 역에서 내렸다.
“지금껏 지하철 성추행에 대해 많이 듣긴 했지만 직접 당하기는 처음이었어요. 그것도 사람이 타고 있는 움직이는 지하철 안에서 말이죠. 그런 사람들에게 법은 무용지물이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상습 성추행범 많다…적극 대처해야”
서울지방경찰청 지하철경찰대 등에 따르면 지하철 내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위험 수위에 다다랐다. 아침·저녁 출퇴근 시간은 물론 대낮에도 성추행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10대 청소년부터 40대 주부에 이르기까지 피해 여성의 연령대도 다양하다. 최근에는 노인이나 노숙자들까지 성범죄에 가세하고 있다.
최근 KBS가 수도권 여성 1,360명에게 ‘지하철 성추행 경험 유무’와 관련해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40.6%가 지하철에서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성희롱을 당했다고 답변한 사람도 24.6%에 달했다.
10명 중 6.5명이 성과 관련한 범죄를 당한 셈이다. 여론조사를 반영하듯 지하철 성범죄 발생 빈도도 매년 늘고 있다. 지하철경찰대에 따르면 2005년 대비 2006년에는 12.1%나 증가했다.
특히 지난 3년간 발생한 1,606건의 지하철 성추행 중 52.3%가 2호선 지하철 내에서 일어났다. 역별로는 사당역에서 가장 많고 그 다음은 동대문운동장역, 충무로역, 신도림역 순이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관계자는 “최근 지하철 성범죄가 전체적으로 늘고 있는데, 특히 노인이나 노숙자들의 성추행이 끊이지 않고 있다”면서 “여성들이 성추행을 당해도 나이가 많거나 노숙자라서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 것을 이용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성추행을 당했을 때 여성들은 참지 말고 그 자리에서 ‘지금 당신이 이렇게 했다.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큰 소리로 딱 부러지게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다”고 충고했다.
지하철경찰대 관계자도 지하철 성추행 예방법에 대해 조언했다.
“성추행은 친고죄이기 때문에 신고하지 않으면 체포할 수 없다.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그런데 외향적인 여성은 대범하게 대처하며 신고도 하지만 내성적인 여성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분들은 112에 문자 메시지를 보내 신고하면 된다. ‘지금 어디서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와 ‘객차 칸 번호’만 적어서 전송하면 된다. 그러면 다음 역에서 거의 다 검거할 수 있다.”
그는 “신고는 많이 접수되지만 해당 여성들의 회피로 인해 처벌되지 않는 케이스가 50%를 넘는다”며 지하철 내 성추행을 뿌리 뽑기 위해서라도 피해 여성들이 적극 대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 지하철 성추행 사례로 거론된 여성들의 이름은 가명임을 밝힙니다.
김승훈 동아닷컴 기자 h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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