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매년 한 번 열리는 KBS의 ‘도전! 독서골든벨’ 녹화현장. 골든벨 아래 앉은 문형범(18·강원 춘천고·사진) 군이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는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 그리고 이것이 등재되어 있습니다.”
문제가 막 한 줄 나왔는데 그의 입가엔 미소가 피어올랐다. 힌트 두 개가 더 남았지만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정답은 ‘승정원일기’. 전국 100개 학교에서 온 100명의 ‘독서왕’이 실력을 겨룬 이날 대회에서 단 한 번의 찬스도 쓰지 않고 50문제를 거침없이 풀어낸 문 군이 골든벨을 울리는 순간이었다.
독서 ‘왕중왕’에다 전교 1등인 문 군이 최근 자신의 독서경험을 엮은 책 ‘18세, 책에게 꿈을 묻다’(황소자리)를 펴냈다. 문 군은 인터뷰 당일에도 “오는 길에 일본 애니메이션 ‘바람의 검심’ DVD를 샀다”며 여유를 보였다. 고교 3학년 수험생이 맞나 싶을 정도로 느긋한 표정이었다. 지난 겨울방학에 썼다는 책에는 그의 독서 편력과 함께 45편의 북 리뷰가 실려 있다. 왜 독서를 좋아하게 됐을까? 한 단어 한 단어 신중하게 골라 말하는 문 군은 2개의 키워드를 댔다. 첫째는 ‘익숙함(Familiarity)’, 둘째는 ‘재미(Fun)’. 이른바 ‘2F’였다.
부모님 독서하시는 모습 보고 자연스럽게 책과 친해져
부모님은 한 번도 책을 읽으라고 강권한 적이 없건만 문 군은 잠이 들 때까지의 길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책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책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던 부모님 덕분에 집 안 어디에나 책은 넘치도록 쌓여 있었다. 전래동화와 명작동화를 거쳐 위인전과 역사책으로 옮겨갔다.
일요일이면 교회를 다녀오는 길에 온 가족이 빠짐없이 춘천 평생정보관 도서관에 들렀다. 그 곳에서 독서를 마치고 온 가족이 매주 6∼9권의 책을 빌렸다. 한 명이 3권까지만 대출할 수 있었기에 문 군은 부모님이 빌리는 분량 속에 자신이 읽을 책을 끼워 넣기 위해 “엄마, 나 한 권만 떼어주라”면서 ‘아름다운 협상’을 벌이곤 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문 군의 가족은 도서관에서 선정하는 ‘가족 다독상’을 받았다.
고교 때부터 국어-논술 고려, 주제-분야별로 가려 읽어
문 군은 ‘독서의 기술’ ‘공부의 기술’ 따위의 책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노하우를 알려 주마’ 식의 권위적 태도에 벌써 거부감이 들어서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권하는 대로 학원에 다닌 적이 있었다. 미술, 피아노, 플루트, 대금, 한자 학원을 차례로 돌고 나서 오후 10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6학년이 되자 학원에 다니는 것이 싫어졌다. 그는 “내가 배우고 싶은 것만 배우겠다”고 선언했고, 어머니는 의견을 존중해주셨다. 덕분에 중학교 때는 텔레비전도 마음대로 봤고, 친구들과 어울려 질릴 때까지 컴퓨터 게임도 했다. 그러나 문 군은 스스로 절제할 줄 알았고, 그의 ‘책 사랑’은 계속됐다. 지금도 그는 집 근처 서점에서 매달 4권 남짓한 책을 사 본다. 서점에 들어섰을 때 먼저 발길이 가는 곳은 역사서나 사회과학서 쪽이다. ‘털 없는 원숭이’ ‘일본은 없다’처럼 상식을 뒤집는 ‘거만한’ 제목에 끌린다고 했다. 신선한 시각을 갖는 데 보탬이 될까 싶어서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문 군의 독서습관에 체계가 잡혔다. 과거엔 취향에 따라 읽었지만, 이젠 국어 수업과 논술시험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책을 분야별, 주제별로 가려 읽게 되었다. 학교 선배나 선생님, 신문과 방송이 소개하는 추천도서 목록을 참고로 했다.
이젠 그동안 쌓아 온 독서지식을 통합해 종횡무진하기도 한다. ‘모든 에너지는 질서에서 무질서로, 사용 가능한 상태에서 사용 불가능한 상태로 변한다. 따라서 모두가 잘사는 사회도 불가능하다’는 핵심 내용을 담은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를 읽고 나서 ‘한 사람의 부자를 위해 적어도 500명의 빈민이 필요하다’고 설파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떠올린다. 이어 ‘물질에 대한 과도한 추구는 인류를 불행하게 만든다. 더 가지려는 욕심을 버려라’라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서 근원적인 해답을 찾았다. 과학, 사회학, 경제학, 철학이 통합되는 순간이다.
“책이 한 권의 책으로만 남는다면 그건 진짜 자기 것이 아니에요. 여러 책을 서로 연결해 이해하면 각 책의 저자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짚어낼 수 있게 되죠.”
문 군은 책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스스로 고민하게 됐다고 한다. 책에서 만난 세상과 사람들은 모두 그의 삶의 멘터(mentor·정신적 조력자)가 된 셈이다.
최세미 기자 luckyse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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