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영화, 생각의 보물창고]‘시간을 달리는 소녀’

  • 입력 2007년 7월 24일 03시 02분


《혹시 ‘슬리퍼 히트(Sleeper Hit)’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작은 규모로 개봉된 영화가 입소문에 힘입어 시간이 지날수록 인기를 끄는 현상을 일컫습니다.

‘블록버스터(Blockbuster·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단시간에 큰 흥행을 올리려고 만들어진 대작)’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로선 생소한 개념이 아닐 수 없죠. 일본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슬리퍼 히트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6월 국내에 개봉될 때는 워낙 규모가 작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어느새 관객 5만 명을 넘어서는 ‘가늘고 긴’ 인기를 누리고 있으니까요. 사춘기 소녀의 시간여행을 다룬 이 애니메이션은 로맨틱하고 감동적인 데다 시간과 운명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까지 담고 있는 수작(秀作)입니다.》

[1] 스토리라인

17세 마코토는 선머슴 같은 말괄량이 소녀. 같은 반 남학생인 지아키, 고스케와 함께 삼총사를 이루어 야구도 하고 인생고민도 나누며 행복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마코토에게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납니다. 과학실에서 넘어지면서 바닥에 떨어진 웬 호두에 몸을 부딪쳤는데, 그때부터 마코토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 리프’ 능력을 갖게 된 것이죠. 마코토는 타임 리프를 이용해 학교 지각대장에서 해방되고, 쪽지시험도 100점을 맞으며, 노래방에선 목이 쉴 때까지 노래를 반복해 부르는 신바람 나는 인생을 누립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깁니다. 허물없이 지내던 지아키가 “나랑 사귈래?” 하고 난데없이 사랑고백을 해온 겁니다. 당황한 마코토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지아키의 사랑고백을 없었던 일로 만들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줄을 잇습니다. 아주 조금만 과거를 바꿨을 뿐인데, 뒤바뀐 과거는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면서 친구들의 운명까지 망쳐놓고 마는 것이죠. 절친한 고스케마저 마코토 대신 교통사고를 당하는 운명의 희생자가 됩니다.

고통스러워하던 마코토는 이윽고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됩니다. 사랑고백을 했던 지아키 역시 타임 리프 능력을 가졌단 사실이죠. 지아키는 먼 미래로부터 현재로 시간을 거슬러 온 겁니다. 마코토는 지아키의 마음속에 담긴 사랑의 진실을 뒤늦게 깨닫지만, 지아키는 다시 미래로 돌아가야 할 운명. 마코토에게 짧은 한마디를 남긴 채 지아키는 사라집니다.

“마코토, 미래에서 기다릴게.”

[2] 핵심 콕콕 찌르기

마코토는 타임 리프 때문에 진정 행복해졌을까요? 아닙니다. 처음엔 과거로 돌아가는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만끽했지만, 이내 타임 리프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시간과 운명을 거슬러 과거를 수정(修正)하는 행위는 비록 나 하나의 삶은 행복하게 만들지 모르지만 나를 둘러싼 많은 사람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고 마니까요. 운명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행위는 결국 대우주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불씨였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친구인 고스케와 그를 짝사랑하는 후배 여학생을 맺어주기 위해 마코토는 과거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나요? 커플이 된 두 사람은 브레이크가 망가진 마코토의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바람에 마코토가 당할 교통사고를 대신 당하고 맙니다.

여기서 영화가 숨겨 놓았던 보석 같은 메시지가 모습을 드러내는데요. 숱한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이죠. 마코토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결국 깨달은 건,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지금 이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였습니다. 다신 반복되지 않는 지금의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야말로 진정 소중한 삶이란 얘기죠.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미래에서 기다릴게”라는 지아키의 한마디는 세상의 어떤 사랑고백보다 진실합니다. ‘네(마코토)가 앞으로 어떤 남자를 만나고 또 어떤 삶을 살게 되더라도 나(지아키)는 미래에서 널 여전히 기다리겠다’는 뜻이니까요. 마코토는 불만스러운 현실을 모면하기 위해 과거로 도피성 시간여행을 벌였지만, 지아키는 달랐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랑을 확인하고 또 지키기 위해 현재라는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왔던 것이죠.

[3] 종횡무진 생각하기

마코토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능력이 생겼다”고 이모에게 자랑합니다. 그러자 이모는 이런 말을 하죠. “네 또래 여자애들한테는 종종 있는 일이야.”

아니, 이게 무슨 난데없는 얘긴가요? 마코토처럼 타임 리프를 사용하는 소녀가 수백 수천 명 살아 있다면 세상은 너무 혼란스러워지지 않을까요? 하지만 우린 이모의 이 말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모의 말에는 중요한 사실이 암시되어 있으니까요. 마코토의 타임 리프 능력이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 마코토만의 환상(fantasy)일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마코토가 타임 리프를 사용하는 순간들을 찬찬히 떠올려 보세요. △‘친구’로 생각했던 남학생이 불현듯 ‘남자’로 다가올 때 △노래방에서 보너스로 주어진 시간이 5분밖에 없어 무지하게 아쉬울 때 △엊그제 먹은 철판구이 요리를 또 먹고 싶을 때 △쪽지시험을 망쳤을 때 △학교에 지각했을 때 △절친한 친구에게 예쁜 애인을 만들어주고 싶을 때…. 이런 순간들엔 어떤 공통점이 있나요? 그렇습니다. 사춘기 소녀라면 흔히들 맞닥뜨리는 운명적인 장면인 동시에, 어떻게든 일단 벗어나고픈 난감한 순간들이죠.

마코토의 타임 리프는 신기루 같은 ‘가짜 현상’일 수 있습니다. 사춘기 소녀가 겪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불확실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고픈 도피 욕망이 타임 리프라는 ‘착각’을 통해 형상화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 ‘문과와 이과 중 어디를 선택할 것인가’를 두고 한때 깊은 고민에 빠졌던 마코토가 티임 리프를 통해 이런 고민을 손쉽게 뛰어넘었듯이 말입니다.

여러분, 영화에서 과학실 칠판에 우연히 쓰여 있던 낙서 한 줄을 기억하나요? ‘Time waits for no one(시간은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맞습니다. 시간은 공평합니다. 시간을 되돌리려 하기보단, 지금 이 순간을 후회 없이 사는 편이 훨씬 손쉽고 또 아름답지 않을까요? 공부와 달리 인생엔 복습이 없으니까요.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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