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유명인 위기 딛고 운명 개척
이 기사는 지금 발매중인 시사주간지 주간동아의 커버 스토리를 요약한 것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주간동아 596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나온 이들을 그린 논픽션 ‘일 분 후의 삶’을 쓰면서 내 눈길이 자연스럽게 가 닿았던 것이 있다. ‘죽음에 필적할 만한 위기’에 위인들은 어떻게 맞섰는가 하는 점이다. 위기는 오랜 기간 내부에 응축된 힘이 순간적으로 솟구쳐 나오게 하는 촉발제이기 때문이다. 운명의 오류처럼 다가오는 그런 위기에 맞선 위인들의 태도를 통해 우리는 그들의 본질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우선 떠오르는 것이 작고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대한 것이다. 그는 1973년 11월 울산에 들어서고 있던 현대중공업 공사 현장에 들렀다. 그는 새벽 3시께 혼자 숙소를 나와 직접 지프를 몰고 작업등이 드문드문 켜진 일대를 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길이 아닌 곳을 따라갔던 터라 갑자기 헤드라이트 앞에 나타난 바위를 피하느라 핸들을 급히 돌려야만 했다. 차는 곧장 절벽 아래로 추락해 깊이 12m의 바다 속으로 빠졌다.
그 이후 과정을 전하는 기록은 놀랍기만 하다. 그는 수압을 이겨내며 지프 문을 급히 연 다음, 물이 차안을 가득 채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단숨에 수중으로 빠져나왔다. 경비원이 그에게 무슨 변고가 났다는 생각에 겁에 질려 벼랑으로 달려오자, 온통 젖은 그가 수면 위로 떠오르며 말했다. “이봐, 빨리 밧줄 던져.” 밧줄을 잡고 물 밖으로 다 빠져나온 그가 한 말은 이렇게 전해진다. “거참, 시원하군.”
정창화 감독은 1960년대 무협영화를 주로 만들던 원로 영화인이다. 그가 자신의 연출부 스태프로 일했던 임권택 감독과 함께 몇 해 전 부산국제영화제의 자기 작품 회고전에 나와 들려준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오래 여운을 남겼다.
“그 무렵에는 우리 영화계가 너무 영세했어요. 모든 걸 감독의 임기응변에 맡기던 시대였지요. 지금은 무술감독과 스턴트맨도 쓰지만 그때는 아무도 없었어요. 특수효과 장치나 컴퓨터그래픽은 상상도 못했고요. 총격 장면에서는 실제 총을 썼는데, 어느 날 맞은편에서 탕 소리가 나더니 제가 쓰러져서 정신을 잃었어요. 탄환이 날아와 왼쪽 가슴에 맞은 거지요. 저는 무슨 이런 일이 있나 하고 생각했는데, 잠바 안주머니에 꽂아둔 대본에 총알이 박혀 있더군요. 그러고 나니 알 것 같았어요. 인생은 태어날 때 받은 선물이고, 우리는 그걸 잠시 빌려 쓰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요.”
그는 그후 오래지 않아 더 넓은 물인 홍콩 영화계로 건너갔고, 자기 영화 인생의 전성기를 맞았다.
창무극 분야의 원로 예인인 공옥진 선생이 전란 도중 겪은 위기는 좌와 우, 남과 북으로 갈린 우리네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전설적인 경관이다. 그는 한창 시절 현장 공연이나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전쟁이 나자 정읍에서 경찰 일을 하던 남편은 먼저 피난 가고, 제 곁에는 태어난 지 사흘 된 딸아이만 남았습니다. 아이를 업고 퉁퉁 부은 얼굴로 뒤따라 천태산으로 피난 가는데, 산후조리를 못해 손발이 저리고 쑤셔왔지요. 그런데 누군가 ‘저기 경찰 부인 간다’고 밀고해 저는 곧장 처형대로 끌려갔어요.
붉은 완장을 찬 사람이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기에 소리나 한가락 하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저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불렀는데, 순간 주위가 숨죽은 듯 조용하더군. 그동안 제 아기는 낯 모르는 아주머니 품에 안겨 고아가 될 운명도 모른 채 자고 있었지요. 소리 한가락 더 하라고 해서 ‘심청전’도 불렀습니다. 완장 찬 사람은 그걸 다 듣고 인민군에게 총을 거두라고 하더니, 재주가 아깝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고단할 때 노래나 한두 곡 불러달라’고 하더군요.
제가 파묻힐 뻔했던 흙구덩이 앞에서 아기를 다시 품에 안고 나니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저는 저를 구원할 것은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죽기 직전 그렇게도 원했던 것이 결국 인생도 살려낼 거라고요.”
세월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해방 공간에 실로 1분 앞도 알지 못한 채 살았던 정치인 여운형이 있다. 그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테러에 시달렸던 정치인이었다. 기록된 것만 따져도 그렇다. 그는 광복 직후부터 1947년 7월까지 모두 열두 차례의 테러에 시달렸다. 그가 분명한 좌익도, 우익도 아닌 자리에서 좌우 합작을 꾀했기 때문이다. 이승만도, 박헌영도 그를 미워했다. 일제의 잔재가 여전했던 당시 경찰은 그의 암살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혐의가 있다. 처음 곤봉으로 시작됐던 테러는 권총 폭탄으로 이어졌다. 범위도 그의 자택과 식구들로 넓어졌다. 그의 방 전체가 날아간 적도 있었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1946년 7월에 벌어졌다. 그 무렵 그는 밤마다 숙소를 바꾸고 있었지만 그의 동향을 훤히 파악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는 서울 신당동의 미군 중위 자택에서 저녁에 비밀회담을 마치고 나오다 권총을 소지한 청년들에게 납치됐다. 괴한들은 그에게 민족에게 죄를 지었다는 내용의 유서를 쓰게 한 뒤 학교 뒷산에서 그의 목을 졸랐다. 그는 눈이 가려지고, 두 다리가 결박된 상태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 태껸을 배웠던 그는 눈가리개를 가까스로 내린 뒤 절벽에 가까운 비탈길로 몸을 던졌다. 그는 낙법으로 살아난 것이다.
그는 테러로 인한 두통과 상처를 안고 살았지만, 그걸 하소연한 적은 없었다. 초기에 그의 생각은 이랬다. “설마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 했겠냐. 내 뜻을 꺾으려고 위협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날이 갈수록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음이 분명해지자 비장하게 결의했다. 그는 식구들에게 말하곤 했다.
“혁명가는 이부자리에서 죽지 않는다. 나는 거리에서 쓰러질 것이다. 그래도 너희들은 울지 말고, 싸워라.”
그는 결국 1947년 7월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숨을 거뒀다. 당시 그는 경호원들과 7인승 리무진에 타고 있었는데, 괴한들이 차량 뒤편 유리창 쪽으로 저격했다. 그가 차 안에서 쓰러지면서 남긴 마지막 말에는 ‘하나가 된 조국’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조선이다….”
권기태 소설가•‘일 분 후의 삶’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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