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놀이와 축제를 즐기기 위해,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혹은 지루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등의 이유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 목적이 어떤 것이든 낯선 곳으로의 여행에는 모험이 뒤따릅니다. 더구나 그곳이 해외에다, 열대지방이라면 우리의 여행을 ‘미지의 세계를 향한 탐험’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겠군요.
아, 이 여행에는 동반자가 한 명 있습니다. 여행기를 작성해줄 ‘레비’ 아저씨인데요, 레비 아저씨는 타잔처럼 힘세거나 날렵하지도 않고, 해리포터처럼 마법을 쓸 줄도 모릅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여행을 싫어하고 탐험도 싫어한다고 합니다.
그건 레비 아저씨가 쓴 ‘슬픈 열대’의 첫 번째 문장만 읽어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여행에 책은 필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행을 다니면서도 책을 읽는데, 우리 여행에서 책을 읽을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오직 보고 느끼기만 하면 됩니다. 이 여행에는 호텔도 없습니다. 아니, 우리가 생각하는 집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마른 옥수수잎 더미 위에 누워서 달콤한 풀잎 냄새를 맡으며 아늑하게 지낼 수 있다면 집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맛있는 음식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썩은 나무에 생긴 커다란 애벌레를 씹었을 때 배어나오는 즙을 버터나 야자나무 과즙으로 상상할 수 있다면 좋은 음식도 있을지 모릅니다.
잘생긴 남자나 아름다운 여자도 볼 수 없습니다. 몸 전체에 기하학적 문신을 새겨 넣은 원주민 여자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원주민에게 ‘짐승 같은 놈’이라고 혼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아름다운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여행을 잘하려면 호흡이 쉽지 않을 만큼 더운 공기를 들이마셔야 하고, 모기장을 뚫고 들어오는 커다란 모기를 견뎌야 하고, 모기가 들끓는 곳에서 세수도 해야 하고, 그 물을 다시 식수로 사용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혹시 벌써 두려운가요? 만약 가고 싶지 않다면 여행을 포기해도 좋습니다. 평생 시골에서 살아온 할아버지에게 햄버거를 맛있게 먹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개고기 먹기를 싫어하는 프랑스인에게 개고기를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브라질의 열대우림을 여행하는 레비스트로스의 여행에 여러분을 강제로 끌고 갈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다만 ‘슬픔’은 기억해야 합니다. 레비스트로스가 관찰한 열대지방은 끝없는 숲과, 말라리아모기,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도 삶의 생기가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슬픈’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습니다. 그 슬픔은 비빔밥을 먹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슬픔과 비슷합니다. 고추장, 참기름, 콩나물, 산나물, 도라지, 고사리 등 온갖 재료가 뒤섞여서 나오는 그 맛을 느끼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걱정이지요.
이 걱정은 서구 문화가 온갖 문화들이 살아 숨쉬는 비빔밥 같았던 지구를 획일화시켰고, 그래서 브라질 원주민들의 문화도 사라질지 모른다는 슬픔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슬픔은 문명화된 우리들 스스로에 대한 감정이기도 합니다. 이 감정은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대기와 풀과 나무와 조화를 이루었던 우리의 아득한 옛 모습을 원주민에게서 발견하고, 돌아갈 수 없는 그때의 평화를 그리워하는 슬픔입니다.
레비스트로스의 말처럼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인간 없이 끝날 것’입니다. 차가운 공기와 뜨거운 공기가 있기에 바람이 불고 계절의 변화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온 세상의 공기가 같은 온도가 되어 바람이 불지 않고 대류도 없어진다면, 그때가 아마 ‘세계의 끝’일 겁니다. 그런데 지금 그 ‘끝’의 공포와 슬픔이 레비스트로스가 느꼈던 것보다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이수봉 학림 필로소피 논술전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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