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리소설 보며 기름 짜는 정영희 씨
밤늦게까지 일하는 남편을 돕기 위해 방앗간을 시작한 것이 2년 전. 하지만 깨 볶는 동안 기계 옆에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지루하고 안타까웠다. 신문 살 곳이 없어 근처 횟집에서 스포츠 신문을 한 달 치씩 빌려 ‘올드뉴스’를 읽는 게 그나마 소일거리.
작년 봄, 딸이 다니는 학교에 도서관이 생겼다. 그가 반계리의 ‘추리소설 여왕’으로 거듭난 것은 이때부터. 치밀한 두뇌 회전의 세계에 몰입돼 한 편의 범죄드라마를 마칠 때쯤이면 깨가 어느새 적당히 볶아져 있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 그는 푸아로 형사 등 등장인물에 대해 술술 꿰뚫고 있다. 책 읽는 아내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남편은 얼마 전 출근길에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단편선을 슬쩍 방 안에 밀어넣어 주었다. 이참에 추리소설을 써 보는 것은 어떨까. 정 씨는 요즘 깨를 볶으며 ‘트릭’을 연구한다.
○ 뮤지컬 읽는 ‘단골손님’ 박은희 씨
2002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공연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혼 전 극장을 즐겨 찾았던 그였다. 인천에서 살 때 같으면 당장 보러 가겠지만 이곳에서는 언감생심. 아쉬움을 달래며 원주시내 서점에 나가 책을 구해 읽었다. 그 뒤 문화에 대한 갈증을 책으로 풀기 시작했고 뮤지컬이나 오페라 관련 책들이 늘 눈에 먼저 들어왔다.
책을 사려면 1시간에 한 대꼴로 다니는 버스를 타고 1시간을 달려 원주 시내까지 가야 한다. 그래서 지난해 딸의 학교에 성인 도서를 포함한 새 책 3000여 권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누구보다 반겼다. 그 전엔 1990년 이전에 발행된 구간이 대부분이었다.
이제 그는 도서관의 ‘단골손님’으로 통한다. 아예 눌러 살다시피 한다. 도서관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책은 거의 없다. 아이의 대출증을 이용하는 다른 학부모와 달리 그는 대출증도 따로 만들었다. 7일 도서관이 문을 닫는 오후 5시, 그의 손엔 ‘카르멘’이 들려 있었다.
○ 인생 3막을 준비하는 안광혜 씨
그래서 막둥이인 민혜(8)가 다니는 학교마을도서관을 이용했다. 인생 지침서나 자기 계발서는 들어오는 대로 모두 그의 차지였다. 다행히 두 아들도 이젠 엄마의 생각을 잘 이해하고 따라 줬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산만한 성격도 차츰 나아졌다.
요즘 관심을 두는 책은 ‘레크리에이션’ 분야. 레크리에이션 강사가 되는 게 인생 제3막의 목표다. 책을 빌려 읽으며 독학에 나섰다.
“아저씨, 왜 우리한테는 안 물어봐요?” 이런저런 이야기에 한참 열중해 있는데 열 살쯤 돼 보이는 아이가 머리를 쑥 내민다. “아, 미안. 넌 이름이 뭐야? 정민? 정민이는 도서관에 뭐가 더 있었으면 좋겠어?” “우리 도서관에는 책 종류가 부족해요.” 드디어 기대했던 대답을 듣게 되어 ‘이거다’ 싶었다.
“그래? 도서관에 어떤 책이 더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매직아이요.”
원주=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도서관, 月 1회 극장으로 변신▼
14일부터 짝수 주 금요일마다 열리는 ‘학부모 평생교육 프로그램’도 그런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최민영 독서교육 담당자는 “교육 여건이 부족했던 지역민들의 특성을 고려해 만든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했다. 작년부터 한 달에 한 번꼴로 시행 중인 ‘영화 상영 프로그램’도 인기 프로그램.
영화 한 편 보려고 원주까지 가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아직까지 영화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주민도 많다. 그래서 호응이 더욱 높다. 이지현(10) 양은 “원주에 있는 큰 극장보다 조용하고 편한 자세로 볼 수 있어 더 좋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상영 횟수도 늘리고 상영작도 다양해지길 희망한다. 최민영 씨는 “영화 선정 방법을 보완하고 시간을 확대해 주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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