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인천상륙작전 때 감행된 월미도 폭격으로 숨진 민간인들과 1875년 일본 운요(雲揚)호와 맞서 싸우다 전사한 조선 병사 35명의 넋을 기리는 행사다.
○월미도 폭격 사건
‘월미도 미군 폭격 희생자 위령제’가 13일 오후 1시 인천 중구 월미공원 전통정원지구 앞에서 처음 열린다.
인천작가회의, 인천시민연대 등 10여 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월미도 미군폭격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공동대책준비위원회’가 행사를 주관한다.
위령제가 열리는 곳은 1950년 9월 13일 새벽 미 항공기에서 투하된 폭탄으로 초토화된 지점이다. 당시 40가구 정도가 모여 살던 어촌이었는데, 집중 포화로 주민의 절반가량이 숨졌다.
인천상륙작전이 본격 개시되기 이틀 전에 해안인 월미도 지역을 집중 공격하면서 이 같은 비극이 일어났다. 상륙작전으로 인천 수복이 이뤄진 이후 미군이 월미산에 주둔하면서 폐허로 변한 민가는 군부대로 편입됐다. 해군 부대가 50여 년간 주둔하다 2001년 이전했고, 지금은 월미공원이 조성돼 있다.
살아남은 주민과 유족들은 폭격 사건 진상 규명과 주거지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지난해부터 월미도 사건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 010-7123-8352
○조선말 영종도 전투
조선 문호를 개방하도록 한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기 한 해 전인 1875년 9월 22일 조선 병사 35명이 일본 운요호와 맞서 싸우다 영종도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운요호는 이날 강화도 초지진 앞바다에서 함포 사격 시위를 한 뒤 인천 앞바다로 돌아 나오다 영종도의 영종진을 지키던 조선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은 함포 사격에 이어 특수부대원 56명을 영종도에 상륙시켜 조선군이 보유한 대포 36문, 화승총 100여 정, 가축을 약탈해 갔다.
전투 과정에서 영종진(현 인천 영종도 구읍나루터 주변)을 지키던 조선군 400여 명 중 35명이 숨졌다.
인천문화발전연구원(원장 박한섭)은 일본인이 1883∼1933년의 인천 역사를 기록한 ‘인천부사’를 번역하다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연구원 측은 2005년 인천부사 번역본(1461쪽)을 발간하고, 터만 남아 있는 영종진에서 혼령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박한섭 원장은 “운요호가 영종도를 공격했다는 역사 사실은 130년간 잘 알려지지 않았다”며 “국토 수호를 위해 숨져 간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해 혼령제를 지내고 있고, 영종진 복원 운동도 벌이겠다”고 말했다.
올해 3회째인 영종진 혼령제는 22일 낮 12시 영종도 구읍나루터에서 치러진다. 032-777-8866
박희제 기자 min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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