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다섯 학교가 통폐합돼 초등학교라고는 겨우 하나 남은 외딴 섬마을. 파도만 조용히 출렁이던 이 마을이 왁자지껄해지기 시작한 건 4월 장목초등학교 안에 ‘책 은행’이라는 것이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시작은 미미했다. 3층 복도 끝 교실 두 개를 터서 도서관이랍시고 만들었지만 양파 농사와 개불, 조개 캐기를 생업으로 삼던 주민들은 당장 사는 게 급했다. “우리 마을에 도서관 하나 있었으면” 했던 학부모들도 전시성 행정이겠지 하고 반신반의했다. 》
외딴섬이라고 문화적으로 소외될 순 없었다. 시인이기도 한 윤일광 교장은 안 되겠다 싶어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대표 김수연)에서 기증받은 3000여 권의 책을 ‘밑천’ 삼아 도서관에 경제관념을 도입하기로 했다.
‘책 한 권 읽으면 50원 저축, 타인에게 양도 가능, 단 현금화 절대 불가.’
이 섬마을 학생들에게는 1인당 1통장과 함께 계좌번호가 부여됐다. 종이로 만들어진 통장의 잔액을 늘리려고 아이들은 부지런히 책을 읽었다. ‘무늬만 독서’는 철저히 가려졌다. 사서교사 장정화(28) 씨가 아이들에게 그날그날 읽은 책 제목과 내용을 확인해 ‘결제’ 도장을 찍어 준다.
○ 독서저축왕 3인방
‘통장 개설’ 5개월 만에 단연 눈에 띄는 ‘독서 부자’가 된 학생은 유준서(9) 군이다. 적게는 하루 6권, 많게는 8권을 저축한다. 요즘 유 군이 ‘꽂힌’ 책은 ‘프란츠 이야기’ 시리즈다. 초등학교 2학년, 자신과 동갑내기인 ‘프란츠’의 좌충우돌을 다룬 이 책을 읽으면서 유 군은 게임 대신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
유 군의 후원자는 이 학교 보건교사인 어머니 양희주(37) 씨. 대뜸 “요새 준서가 책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안 나온다”며 행복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도서관이 없었을 땐 인터넷을 통해 책을 주문했어요. 돈이 많이 든다는 걸 아이도 아니까 읽은 책을 읽고 또 읽고 그러더니….” 도서관이 생기고 나서 그녀가 가장 먼저 마련한 것은 대출 전용 가방이다. 책 욕심이 많아진 준서를 위해 가방에 책을 ‘공수’해 간단다.
추리소설에 재미를 들인 6학년 임희진(12) 양도 목표가 생겼다. 도서관 책꽂이에서 발견한 셜록 홈스, 괴도 뤼팽, 명탐정 코난 등을 읽으며 올해 안에 도서관의 모든 추리소설을 섭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건의 실마리를 통해 범인을 잡아내는 걸 보면 내가 직접 문제를 푼 것 같이 뿌듯해요.”
여드름이 생겨 고민이던 김현지(12) 양. 며칠 전 ‘안녕하세요 하느님 저 마거릿이에요’라는 책을 읽고 고민이 해결됐다. 책 속에 등장하는 또래의 여자 친구들이 김 양과 비슷한 고민을 털어놓고 서로 해결해 주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했다.
○ “책도 읽고 기부도 하고”
이렇게 아이들 통장에 쌓인 ‘잔액’은 필요할 땐 학용품과 도서상품권으로 바꿀 수 있다. 특이한 점은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에게 ‘계좌이체’가 가능하다는 것. 졸업을 하거나 전학을 가면 그동안 모은 마일리지를 학급에 기부할 수 있다.
주민들도 책을 빌려 획득한 마일리지를 학교에 보탠다.
윤 교장은 “책과 도서관이 갖춰져도 적절한 동기 부여를 통해 책을 많이 읽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도서관과 독서 마일리지 덕분에 조용한 섬마을이 왁자지껄하게 됐다”고 말했다. 독서가 나눔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학생과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배워 나가고 있었다.
변화는 두드러졌다. 생업에 쫓겨 학교에 발을 들여놓지 않던 학부모와 마을 사람들이 도서관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180여 명의 학생은 하루 평균 80권을 빌려 간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던 신명순(54·주부) 씨는 “일에 쫓기고 도서관이 너무 멀어 독서할 엄두를 못 냈는데 코앞에 도서관이 생기니 일하다가도 짬을 내서 오게 된다”며 “마을 도서관이 장목에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문화오아시스”라고 말했다.
거제=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TV 끄자” 경남교육청 독서운동 팔 걷어▼
장목마을의 독서혁명은 한 학교에 도서관을 설치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지자체들이 전방위로 독서운동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올해 초부터 경남도교육청은 독서 습관을 가정에서부터 들이자는 의도로 ‘오프 티비, 온 북(Off TV, On Book) 운동’을 벌이고 있다.
각 가정의 텔레비전과 컴퓨터 모니터, 전 교직원의 차량에 ‘오프 티비, 온 북’이라고 쓰인 스티커를 붙이고 도민 전체가 참여하는 혁신 프로젝트 사업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경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 유승규 장학사는 “최근에는 마산의 한 아파트 부녀회에서 TV를 없애자는 캠페인까지 벌일 정도로 효과가 크다”며 “단순히 전원을 끄는 것뿐만 아니라 TV를 아예 없애는 방향으로 이 운동을 점점 확산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경남도교육청은 월 1권 선정된 도서에 대해 가족이 식사시간에 모여 이야기하도록 하는 ‘밥상머리 독서운동’, 또 가족마다 인생의 좌우명을 제목으로 붙인 가족 공동 독서노트를 마련해 다같이 독서노트를 채워 나가는 ‘1가족 1독서노트’ 운동도 추진 중이다.
거제교육청도 초등학생의 경우 연간 30권 이상, 중학생은 연간 50권 이상 책을 읽게 하자는 ‘책읽기 3050운동’을 펼치고 있다. 9월 1일 현재 초등학교는 70% 이상, 중학교는 60% 이상 참여하고 있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