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테뉴어 심사에서 탈락된 교수들에게는 말 붙이기도 어려워요. 그분들도 얼굴을 마주치려 하지 않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한 학과장은 “한마디로 초상집 같다”고 이 대학 교수사회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평생 수재 소리를 듣던 사람들이 ‘탈락자’라는 불명예를 난생 처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의 대학에서 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번 ‘사태’는 유수의 이공계 명문 대학인 KAIST 안에서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국가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대학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불가피한 시대적 요청이라는 측면도 있다. 다른 대학에도 여파가 미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충격에 휩싸인 KAIST 교수들
KAIST 교수 400여 명 중 90% 정도는 국내 명문대를 나와 해외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 해외파 중에서도 70% 정도는 미국 동부의 아이비리그 등 명문대 출신이다.
이번 테뉴어 심사에서 탈락한 15명의 교수는 본인은 물론이고 학과장과 학장이 “이 정도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자신할 만큼 내부적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이어서 충격이 더욱 컸다.
이 대학 전체 교수 400여 명 가운데 200여 명은 이 제도가 강화되기 전에 심사를 받았으며 탈락한 경우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번에 탈락한 교수들은 사실상 ‘퇴출 초읽기’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 대학 고위 관계자는 “탈락한 교수들이 남은 계약기간 중 다시 테뉴어 심사를 신청할 수 있겠지만 이공계 연구의 특성상 1∼2년 사이에 연구 성과가 좋아지기를 기대하기는 대단히 어렵다”면서 “특히 탈락자들은 ‘자존심’ 때문이라도 버티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남표 총장의 개혁 신호탄
KAIST의 테뉴어 제도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오랫동안 교수생활을 한 서남표 총장이 지난해 7월 취임한 이후 대폭 강화됐다.
이와 관련해 서 총장은 “교수 중 20%만 테뉴어를 받아 정년이 보장되는 하버드대와 경쟁하려면 내부 개혁이 필요하다”며 “이미 세계 수준인 KAIST나 서울대 입학생을 데리고 세계적인 대학을 못 만들어 낸 것은 교수들의 책임”이라고 평소에 강조해 왔다.
그는 특히 서열, 호봉, 나이와 무관하게 능력으로 판단하라는 강한 메시지를 테뉴어 심사를 맡는 인사위원회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심사에서는 서울대에서 강의하다가 최근 이 대학으로 옮긴 조광현(36·바이오 뇌 공학과) 교수와 싱가포르국립대에서 강의하던 조병진(43·전기 전자공학과) 교수가 신규 임용과 동시에 정년이 보장되는 테뉴어를 받았다. 반면 50대 교수들이 대거 탈락했다.
이와 관련해 서 총장은 테뉴어 심사 결과가 나온 뒤 교수들이 대거 탈락한 학과의 학과장을 불러 “왜 학과 차원에서 엄격히 거르지 않았느냐”고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대학에도 영향 미칠까
KAIST의 테뉴어 제도처럼 연구 성과에 따라 교수를 일정 시기에 ‘걸러 내는’ 제도는 한국의 다른 대학들도 갖추고 있다. KAIST처럼 제도를 엄격히 적용해 다수의 교수를 탈락시키지 않는 것이 차이점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다른 대학들도 정년을 보장해 주는 정교수 임용 기준을 까다롭게 바꾸고 있다.
서울대 경영대는 올해 정교수 승진 심사 기준을 대폭 강화했다. 심사가 까다로운 세계 10대 학술지에 8편 이상의 논문을 실어야 정교수 승진 자격을 주기로 했다.
또 서울대 공대와 자연대는 조교수와 부교수 승진 심사에 외국인 학자를 참여시키고 있다. 외국인 심사위원은 사적인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심사 대상자를 객관적으로, 철저히 평가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한양대는 교수 재임용 기준에 미달하더라도 재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지금까지 7번까지 줬지만 앞으로는 탈락한 뒤 3년 안에 한 차례만 기회를 주기로 했다.
여타의 대학들에도 엄격한 재임용 및 승진 기준이 속속 도입될 것으로 보인다.
대전=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김기용 기자 kky@donga.com
:테뉴어 제도:
교수로 임용된 뒤 일정기간이 지나 연구성과 등을 심사해 통과한 교수에게는 정년을 보장해 주지만, 탈락하면 퇴출시키는 제도. 선진국의 대학들은 교수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대부분 이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KAIST 개혁” 서남표 총장은▼
▽프로필 △1959년 미국 MIT 졸업 △1964년 미국 카네기멜런대 기계공학 박사 △1970년 MIT 기계공학과 교수 △1973년 MIT 제조생산연구소 초대 소장 △1984∼1988년 미국 NSF 공학담당 부총재 △1991∼2001년 MIT 기계공학과 학과장 △1995년∼현재 한국과학기술 한림원 공학부 종신회원 △2006년 KAIST 제13대 총장 △2006년 국제생산공학아카데미 제너럴피에르니콜라우상 △2007년 미 플라스틱공학회 종신업적상 △2007년 이스라엘 테크니온 공대 및 호주 퀸즐랜드대 명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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