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앞둔 21일 금요일. 추수로 정신없이 바쁜 변정아(43·전남 장성군) 씨는 이날도 장성군 북일초교의 북일마을도서관을 찾았습니다.
변 씨는 북일마을도서관의 유일한 도우미입니다. 독서지도교사가 계시지만, 책 대출과 반납부터 서가 정리, 도서관 청소까지 도서관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이 변 씨의 손을 거칩니다. 변 씨는 일주일에 2, 3일 도서관으로 갑니다.
“도서관 올 때가 젤로 행복하당께요.”
왜냐고요? 학교에 온 아들 김윤호(11·북일초교 4년) 군을 또 만날 수 있으니까요. 동그란 눈, 가무잡잡한 피부, 익살 가득한 표정의 윤호. 가만히 보니 또래보다 키가 한 뼘이나 작습니다. 체육 시간에도 축구처럼 격한 운동은 못합니다.
윤호는 심장이 아픕니다. 엄마는 배 속에서 나온 아기의 심실이 하나밖에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윤호는 태어난 뒤 석 달 동안 세 번이나 수술을 받았습니다. 엄마의 가슴은 얼마나 찢어지게 아팠을까요.
2002년 윤호는 심장 박동을 보조하는 인공심장을 달았습니다. 2005년 배터리가 불안정한 인공심장을 바꿔 달기까지 수술을 여섯 번이나 받았습니다. 지금도 석 달에 한 번씩 서울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윤호와 가까이 있고 싶어서 도우미를 자청한 거랑께요.”
종일 왁자지껄한 ‘도서관 방문객’들을 관리하느라 진이 빠지지만 변 씨는 아들을 곁에서 볼 수 있단 사실만으로 행복합니다.
점심시간. “오늘 엄마 오는 날”이라며 윤호가 부리나케 도서관으로 와 변 씨에게 안깁니다. 윤호는 엄마가 있을 때면 아예 도서관을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책 읽는 시간도 부쩍 늘었습니다. 꿈이 프로게이머인 윤호는 지난해 장애학생e스포츠대회 카트라이더 부문에서 1등을 할 정도로 실력이 좋지만 엄마는 게임에만 빠진 것 같아 내심 걱정이었습니다. 도서관 덕분에 이젠 그런 걱정도 싹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책을 읽다 보면 언젠가 윤호도 튼튼한 심장을 되찾겠지요.
“윤호 수술비가 한 번에 1000만 원이고 검사비도 100만 원이 넘어요. 아이고, 요즘 책값이 엄청 비싼디, 책값이라도 안 드니 얼마나 좋아요.”
윤호가 ‘그리스로마 신화’를 펼쳐 들자 변 씨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얘기하며 환하게 웃습니다.
○ 혜림의 꿈, 작은 도서관
70여 명 전교생이 책 읽기에 여념이 없지만 도서관의 터줏대감은 따로 있습니다. 유혜림(11·북일초교 4년) 양입니다. 혜림이가 어찌나 책을 좋아하는지 선생님들은 “비유가 아니라, 책이 손에서 떨어질 날이 없다”고 입을 모읍니다. 어머니 나연숙(36) 씨는 “집에 책을 가져오지 말라고 해도 하루에 서너 권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온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흐뭇하게 웃습니다.
나 씨는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의 조선족 출신입니다. 1996년 남편을 만나 장성군으로 왔습니다. 2년 전부터 풍물을 배울 정도로 우리 문화에 관심이 많아 혜림이가 어릴 때부터 한글 책을 많이 읽어 줬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혜림이는 어린 시절부터 밥 먹을 때도 한 손엔 숟가락, 한 손에 책을 쥐었답니다. 하지만 마을엔 책을 빌릴 곳이 없었습니다. 버스 타고 걸어서 1시간 넘게 걸리는 읍내 문화센터까지 가야 했습니다. 혜림이의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지만 딸기 농사로 바쁜 엄마가 매일 읍내로 책을 빌리러 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이젠 사정이 다릅니다. 첫 수업 전부터 도서관에 진을 친 혜림이는 수업 시작종이 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도서관 도우미 변 씨가 “들어가라!” 몇 번 소리쳐도 소용없습니다. 혜림이는 “책이 너무 좋아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돌려주고 싶지 않을 정도”라고 하네요.
지난 학기에 열린 ‘독서골든벨’에서 마지막 골든벨을 울린 주인공도 혜림입니다. 북일초교는 학기마다 학생들에게 책을 골라 읽게 하고 책 내용 중에서 문제를 내는 ‘골든벨 퀴즈대회’를 엽니다.
북일마을도서관이 생기고 나서 혜림이에게 꿈이 생겼습니다. 도서관장입니다. 눈치 안 보고 책에 뒤덮여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도서관장이 되면 제 평생 책을 얼마나 더 많이 읽을 수 있을까요?” 기대에 찬 눈빛이 초롱초롱합니다.
장성=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작년 도서관 열기까지
북일마을도서관은 지난해 ‘작은 도서관 만드는 사람들’(대표 김수연)이 3000여 권의 책을 후원해 문을 열었습니다.
최동수 북일초교 교장은 “낙후된 시골이라 아이들이 체험할 수 있는 문화가 없고 수업과 연계할 책도 극히 부족했다”고 말합니다. 정부의 ‘학교도서관 현대화 사업’에 선정돼 도서관을 리모델링할 기회를 얻었지만 막상 읽을 책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도움의 손길을 찾던 중 ‘작은 도서관 만드는 사람들’과 연이 닿았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올해 지원사업이 마감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주민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민들의 서명을 받아 도서관이 생겨야 할 이유를 장문의 편지로 써 보냈습니다. 정성에 감동한 ‘작은 도서관 만드는 사람들’이 ‘특별 지원’을 결정했습니다.
힘들게 이뤄낸 도서관이라 주민들의 정성이 지극합니다. 점심시간에 시간을 내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줍니다. 학교는 학기별로 가장 책을 많이 읽은 학생을 뽑아 상을 줍니다. 5권 읽을 때마다 독서인증서를, 20권마다 교장선생님의 인증서를 받습니다.
도서관 소식을 들은 동문들이 책을 보내 주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 전, 동문은 아니지만 장성군 출신의 선배가 취직 후 첫 월급을 쪼개 책을 보내 줘 모두 감동 받았습니다. 후배들에게는 시골 학교란 이유로 마음껏 책을 읽지 못한 학창시절을 겪지 않게 하고 싶어서겠죠.
장성=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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