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역사상 가장 도덕에 민감한 나라였다. 상복(喪服)을 몇 년 입을지 등등의 문제로 죽기 살기로 다투는 나라가 몇이나 있겠는가. 조선에서 이런 논란은 일상이다시피 했다. 제사상에 놓을 음식의 위치, 웃어른에게 경우를 차리는 법 등, 예의 법도만을 연구하는 예학(禮學)이라는 학문이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조선은 성인군자의 나라였어야 옳다. 하지만 현실의 조선은 그렇지 않았다. 권력 싸움은 어느 시대보다 치열했고, 지도층의 무능함과 부패도 심각했다. 왜 그랬을까.
한 달 뒤의 경제 흐름을 놓고 벌이는 논쟁에서는 섣불리 입을 열기 어렵다. 예측에는 전문지식이 필요할뿐더러 나중에 드러날 결과로 자신의 잘잘못이 분명해지는 까닭이다. 그러나 도덕은 어떤가. 어설픈 느낌만으로도 누구나 전문가처럼 굴 수 있다. 누군가 여인네들의 짧은 치마를 보고 윤리가 땅에 떨어졌다며 혀를 차도, 과연 그런지 ‘검증’하자며 맞설 만한 문제는 아니다. 그냥 “고루한 생각을 갖고 계시군요” 등으로 맞대꾸할 뿐이다. 그러니 도덕은 말싸움 벌이기 딱 좋은 소재다.
춘원(春園) 이광수는 ‘조선 600년은 공리공담(空理空談·아무 소용이 없는 헛된 말)의 역사’라며 한탄했다. 헛헛한 도덕 논쟁으로 서로 헐뜯는 데 세월을 다 보냈다는 뜻이다. 도덕윤리를 놓고 벌이던 ‘600년 당쟁의 노하우’는 오늘날에도 힘을 쓰고 있다. 지금도 ‘비윤리적’이라는 꼬리표는 잘나가는 정치가들을 단칼에 날려 버리는 핵폭탄이 아닌가. 그래서 정치가들은 빨개진 눈으로 상대편의 도덕적인 흠집을 찾는 데 매달린다.
하지만 네거티브(negative)는 네거티브일 뿐이다. 관심이 온통 어두운 구석을 파는 데에만 모아진 사회가 발전한다 할 수 있을까. 잘못을 고치는 일과 미래로 나아가는 일은 다른 문제다. 비전을 보고 뛰는 이들에게 상처는 고쳐야 할 ‘고장’일 따름이다. 하지만 멈춰 서 주저앉은 이들에게 상처는 그 자체로 심각한 문제다. 자꾸만 곱씹고 파고들어 고통을 더 크게 느낀다.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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