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고전여행]이사벨라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 입력 2007년 11월 12일 03시 00분


벽안에 비친 구한말 이땅은

‘천국의 향기처럼 아름답고

순수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 마음은

왜 이리 때가 묻었을까요

64세에 여행을 시작해서 67세에 한국 여행을 마친 영국 여인 비숍은 이렇게 감회를 털어놓습니다.

“한국은 이용할 줄 모르는 독립이라는 선물을 일본으로부터 받았다. (중략)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의 운명을 놓고 대결한 상태에서 떠나게 된 것이 유감스럽다. 내가 처음에 한국에 대해서 느꼈던 혐오감은 이젠 거의 애정이랄 수 있는 관심으로 바뀌었다. 이전의 어떤 여행에서도 나는 한국에서보다 더 섭섭하게 헤어진 사랑스럽고 친절한 친구들을 사귀어 보지 못했다. 나는 가장 사랑스러운 한국의 겨울 아침을 감싸는 푸른 벨벳과 같은 부드러운 공기 속에서 눈 덮인 서울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비숍은 1894년부터 1897년까지 한국 여행을 합니다. 이때 한국에서는 동학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을미의병, 아관파천, 단발령발표, 독립신문 창간과 같은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명성황후는 비숍이 가장 좋아했던 한국인이었습니다.

비숍은 서울, 부산, 인천, 고양, 파주, 서흥, 봉산, 황주, 원산, 개성, 자산, 가창, 안주, 덕천, 평양, 알일령, 무진대, 순천, 금강산, 남한강, 북한강, 한강 전역, 두만강, 만주 한국인 마을, 시베리아 한국인 마을 등을 여행합니다. 한국 사람도 다니기 쉽지 않은 산골짜기를 걷기, 당나귀 타기, 말 타기, 나룻배 타기 등의 방법으로 4년 동안 여행했습니다. 그녀가 잠을 잔 곳도 경복궁, 선교원, 여관, 서민들의 집, 외양간, 나룻배 위 등이었습니다. 운이 좋을 때는 봉우리를 몇 개 넘어 발견한 마을에서 하루를 묵어갈 수 있었지만, 운이 나쁠 때는 사악한 외국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집주인과 몇 시간 동안 실랑이를 벌여야 했습니다.

어떤 날은 견딜 수 없이 뜨거운 온돌방에서 잤지만, 또 어떤 날은 영하를 밑돌 만큼 추운 방에서 떨며 자야 했습니다. 깨끗한 방도 있었지만 수십 마리의 벼룩 빈대 파리를 물리쳐야 하는 방도 있었습니다. 숙소에서 편안히 쉴 때도 있었지만 마을의 아낙들이 몰려와서 ‘백인도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인지 확인해 보기 위해’ 비숍을 꼬집어댈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비숍은 허리를 다치기도 하고, 팔이 부러지기도 하고, 얼어 죽을 뻔하기도 하고, 굶어죽을 뻔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험을 한 비숍이 지금으로부터 110여 년 전의 한국에 대해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곳’이라는 평가를 내립니다.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그녀는 ‘천국의 향기와 같은 아름다움’을 느끼지만 풍경에서만 아름다움을 느낀 것은 아니었습니다. 64세의 예민하고 지칠 줄 모르는 육체와 정신을 가진 이 집요한 관찰자의 감각에는 한국의 그 무엇이 아름답게 비쳤던 것일까요?

“매우 이른 아침에 몇 명의 부인이 달걀 선물을 주기 위해 몇 리를 걸어서 배에 올라왔던 일도 있다. 그들이 바란 대가는 날 한 번 보고 나의 보잘 것 없는 살림살이를 보는 것이었다.”

비숍은 한국인의 때 묻지 않은 마음을 본 것일까요? 그러나 우리에게 듣기 좋은 얘기만 책에 씌어 있지는 않습니다. 듣기 괴로운 얘기도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한국의 낡은 질서는 일본인 고문관의 압력 아래 매일매일 바뀌어 갔고 대체로 그 변화는 개선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비숍은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 정치가를 증오하지만,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의 악습을 타파하고 한국을 더욱 살 만한 곳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녀가 가장 많이 비판한 것은 부패한 한국의 벼슬아치들입니다. 그녀가 본 관리들은 오직 백성을 착취하기 위해 관직에 집착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게을러 보이는 민중도, 이 세상에서 호랑이를 제일 무서워하는 무식한 농사꾼도, 그녀는 안타까움과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찰합니다.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위험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언젠가 한국도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농민과 민중에게서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이 책에는 역사 교과서가 말해 주기 싫어하는 혹독하지만 상세한 진실이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외부 관찰자인 비숍의 편견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고 있는 우리들 자신의 편견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조심스러운 관찰자가 발견한 조선인의 순수성만큼 우리 자신의 때 묻어버린 마음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슬퍼지고 안타까워지고 아쉬워집니다.

이수봉 학림 필로소피 논술전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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