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보이들의 동성애를 다룬‘브로크백 마운틴’, 여성 스파이의 금지된 사랑을 담은‘색, 계’, 푸른색 괴물로 돌변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옮긴 ‘헐크’…. 이런 일련의 작품을 통해 그가 일관되게 제기하는 질문은 이겁니다.
‘인간은 욕망을 이겨낼 수 있을까?’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욕망을 이겨낼 수 있기에 인간인 걸까요, 아니면 인간이기에 욕망을 이겨낼 수 없는 걸까요.
리안 감독의 문제의식은, 무협대작의 외피를 두른 멜로 영화 ‘와호장룡(臥虎藏龍)’에서도 뚜렷이 드러납니다.
여기엔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시기하거나 죽이고 싶어 하는 수많은 남녀 무사들이 등장합니다만, 그들은 알고 보면 하나같이 똑같은 존재나 다름없습니다. 뭔가를 간절히 욕망하는 인간이란 점에서 말이지요. ▶easynonsul.com에 동영상 강의》
저마다의 욕망을 좇는 인간… 절대선과 절대악이 있을까
[1] 스토리라인
19세기 중국. 최고 무술 문파인 ‘무당파’의 수제자 ‘리무바이’(저우룬파·周潤發)는 무예를 중단하고 강호(江湖)를 떠날 결심을 합니다. 사부가 ‘푸른 여우’란 여자자객에게 목숨을 잃자, 무술에 깊은 회의를 품게 된 것이지요. 그는 ‘더 이상 피를 보지 않겠다’는 뜻으로 자신의 보검 ‘청명검’을 ‘수련’(양리칭·楊紫瓊)에게 맡깁니다. 리무바이와 수련은 오랜 기간 서로 사랑해왔으나 마음을 입 밖에 내어 표현하지 못한 사이죠.
한편 뼈대 있는 가문의 규수 ‘용’(장쯔이·章子怡)은 귀족 자제와의 정략결혼을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겉모습은 서예와 수예에 능한 여성이지만, 알고 보면 그녀는 푸른 여우로부터 십수 년간 무술을 배우고 익힌 무술의 고수입니다. 오래전 사랑을 약속한 마적단 두목 ‘호’(장첸·張震)와의 재회를 열망하던 그녀. 자유를 꿈꾸던 그녀는 청명검을 훔쳐 달아납니다.
수련과 함께 청명검을 찾아 나선 리무바이는 마침내 용과 맞닥뜨립니다. 하지만 비범한 그녀의 무술실력을 보고는 자신의 제자로 삼으려 하지요. 금이야 옥이야 키우고 가르쳐온 제자를 하루아침에 빼앗길 위기에 처한 푸른 여우가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푸른 여우는 리무바이에게 독침을 날리고, 리무바이는 사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또다시 손에 피를 묻힙니다.
[2] 핵심 콕콕 찌르기
리무바이의 영혼은 고통스럽습니다. 평생 자신의 욕망을 입 밖에 내어 말하지 못하는 숙명을 끌어안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리무바이는 수련을 사랑해 왔지만, 수련은 자신의 가장 절친한 친구의 약혼녀였습니다. 비록 친구는 이제 죽고 없지만, 리무바이는 친구와의 신의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수련에게 감히 사랑을 고백할 수 없었지요. 무예를 갈고닦는 무사(武士)로서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신의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리무바이가 겪는 번뇌의 본질을 알게 됩니다. 그는 ‘사회적 자아’와 ‘개인적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회적 자아란 뭔가요? ‘어떤 사람이 속한 집단이나 사회 안에서 자신이 갖게 되는 정체성’입니다. 리무바이의 사회적 자아란 ‘무당파의 수제자’, 즉 무도(武道)를 추구하는 무사로서의 자신이겠지요. 수련이 용에게 밝혔듯이, 무사의 철칙은 ‘우정과 신의, 그리고 고결함’인 겁니다.
이번엔 개인적 자아에 대해 알아볼까요? 개인적 자아란 ‘본능과 욕망에 충실한 자신’입니다. 결국 리무바이의 개인적 자아란 ‘수련과의 사랑을 이루고픈 자신’이지요.
결국 리무바이는 ‘무예를 닦는 무사’로서의 자신과 ‘뜨거운 사랑의 가슴을 가진 남자’로서의 자신, 이렇게 충돌하는 두 개의 자아 사이에서 짓눌려 왔던 것입니다.
사회적 자아와 개인적 자아가 맞부딪친다는 점에서 수련과 용이란 인물도 리무바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먼저 수련을 볼까요? 사별한 약혼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평생 리무바이를 마음속으로만 사모할 수밖에 없었지요. 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양가집 규수라는 사회적 자아를 가진 그녀이지만, 그녀의 개인적 자아는 이로부터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용은 마음껏 무예를 뽐내면서 세상을 주름잡고 뜨거운 사랑도 해보는, 그런 자유로운 삶을 욕망했으니까요.
사회적 자아와 개인적 자아가 같지 않은 세상, 사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역할과 나의 가슴이 진정 욕망하는 것 사이에 먼 거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세상. 바로 이것이 ‘강호’의 저주스러운 본질이라고 영화는 말합니다.
[3] 더 깊이 생각하기
영화를 깊숙이 들여다보면 정말 아이러니하고도 재미난 사실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강호엔 진짜로 나쁜 자도, 진짜로 좋은 자도 없다는 사실이죠.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요? 주인공인 리무바이를 봅시다. 그는 사부의 원수를 갚겠다는 정당한 이유로 푸른 여우를 죽였습니다. 제자가 스승의 복수를 대신한다는 건 어쩌면 당연하게 요구되는 강호의 법도이지요.
하지만 리무바이에게 죽임을 당한 푸른 여우는 뼛속부터 악인일까요? 아닙니다. 그녀에게도 기실은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습니다. 푸른 여우는 당초 리무바이의 스승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쳤습니다. 무당파의 무술을 전수받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러나 푸른 여우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스승은 푸른 여우를 외면해 버렸습니다. 격분한 푸른 여우는 스승을 죽이게 된 것이고, 이후 그녀는 자신과 같은 여자(용)를 제자로 삼아 천추의 한을 풀려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자신의 모든 인생이 투영된 제자(용)를 리무바이가 하루아침에 빼앗아가려 하니, 푸른 여우 또한 일종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원한은 원한을 낳고, 피는 피를 부르고, 때로는 선이 악을 낳습니다. 이런 허망한 운명의 사이클이 무한 반복되는 곳이 바로 강호, 이 세상입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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