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파 - 화려한 언변으로 포장
공문서 위조… 지도층에 줄대기…
벼락성공위해 온갖 수단 안가려
사회의 격 올리는 ‘성장통’ 돼야
‘사기꾼’임에 틀림없지만 고전적 이미지의 범죄자는 아니다. ‘젊고 잘생긴(혹은 예쁜) 젊은이’ ‘유학파 엘리트’로 포장돼 있다. 한 명은 당대의 권력층과, 또 한 명은 미래의 예비권력층과 한 때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가 검찰의 수사대상이 됐다는 점도 공교롭다.
초년 출세, 벼락 성공의 유혹 속에 결국 ‘일탈의 길’로 빠져든 두 사람이 21세기 선진국을 바라본다는 대한민국을 이처럼 뒤흔들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토양은 과연 건강한 것이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환상을 심어 준 그들=김경준 씨는 금융전문가이고, 신정아 씨는 큐레이터이다. 또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 출신이거나, 최소한 그 출신으로 포장돼 있었다. 그들의 직업과 학벌은 ‘한가락 하는’ 한국 사회 지도층이나 엘리트 계층에서도 차별화되는 대목이 있다. 요컨대 사람들에게 일종의 ‘판타지’를 선사했다는 것이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도 “우리나라 금융 수준이 낙후됐다고 생각해서 한때 전문가라는 김 씨와 동업을 생각했다”고 말했을 정도로, 제조업이 주종인 국내에서 세계 수준의 자산운용 전문가는 아직도 손에 꼽을 정도다.
김 씨는 코넬대 경제학과, 시카고대 경제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뒤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와튼 스쿨)에서 경영학석사(MBA)를 취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와튼스쿨은 금융 부문만은 하버드대 스탠퍼드대보다 비교우위를 자랑하고 있다. 한국에서 해마다 25명가량이 와튼 스쿨에 입학하지만 김 씨처럼 모건스탠리 같은 투자은행에서 20만 달러 이상의 초봉을 받고 취업하는 한국인은 2, 3명이 고작이다.
미술품의 전시를 기획하고 대외업무도 담당하는 큐레이터 또한 아직 일반인들에게는 익숙지 않은 직업이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앞에 두고 중상층 이상에서 미술품에 대한 수요가 늘었지만 이와 관련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전문가그룹은 아직 충분치 못한 상황이다. 신 씨가 한때 행세하고 다닌 것처럼 실제 예일대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면 그 자체로도 대단한 영예로 인식된다. 학교 측은 한국인 박사는 최근 수년째 한 명도 없었다고 공식 발표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가짜 박사’임이 드러나기 전 ‘신정아 브랜드’의 가치는 문화예술계의 일반 유학파에 비해 더 빛났다고 할 수 있다.
연예인처럼 꽃미남 꽃미녀 과(科)는 아니지만 이들의 외모도 흡인력이 강했다. 특히 성형술 등의 후천적 방법으로는 연출이 쉽지 않은 우윳빛 피부나 고운 머릿결 등이 회자(膾炙)됐다. 둘 다 카메라를 향해 야릇한 미소를 한 번씩 흘렸을 만큼의 쇼맨십도 갖췄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명박 후보는 사업 초기에 동업을 철회했으나 변 전 실장은 로맨스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상당수 정신과 전문의는 일단 둘이 정신병으로 분류되는 ‘B군 성격장애’나 ‘병리학적 거짓말(pathological lie)’의 경계까지 간 것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는 경우나, 거짓말을 하면서도 자신은 ‘참말’이라고 확신하는 증상 등을 뜻한다. 권력, 성공, 자본지향적 사회가 되면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계층에서도 어렵잖게 발견되는 사례라고 한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김경준 신정아 씨의 거짓말은 황우석 교수나 증권거래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언도받은 주수도 전 제이유그룹 부회장의 행태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벼락 성공을 이루기 위한 필요충분조건격인 거짓말 때문에 낙마한 케이스”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 성찰할까=우리 사회가 김 씨나 신 씨의 사기행각을 방조한 측면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고도성장을 겪으며 여타 선진국에 비해 성공과 자아실현에 대한 명확한 공감대 설정이 이뤄지지 못한 대신, ‘남과의 비교’를 통해 신뢰성을 부여하는 국민성과도 관련 있다고 한다.
특히 어떤 사람을 규정하는 속성 하나를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는 ‘과잉 일반화’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넘어서야 할 장애물이라는 시각이 많다.
정신과 전문의 양창순 박사는 “과잉 일반화는 일종의 흑백논리다. ‘와튼스쿨 출신’ ‘예일대 박사’라는 간판이 한 사람의 다른 특성이나 개성, 약점까지를 묻히게 만든다는 점이 문제”라고 말했다. 양 박사는 “좋게 보면 신정아 김경준 씨 사태가 우리 사회의 격을 한 계단 올리는 성장통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 사회 지도층이나 엘리트라고 생각한다면 좀 더 의무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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