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토론해 봅시다]투표를 의무로 할수 있을까?

  • 입력 2008년 1월 7일 02시 53분


○ 배경

제17대 대선 투표율이 62.9%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13∼15대 선거까지는 80%대를 유지하다가 16대 선거에서 70.8%로 주저앉더니 이젠 60%대까지 밀려났다.

‘민주주의 최고 통치자는 유권자’라는 미국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선거와 투표 행위는 민주주의의 근간임에 틀림이 없다. 선거는 국민에 의한 통치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장치이자, 정치권력이 시민으로부터 나고 시민을 위해 위임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시민은 선거에 참여함으로써 시민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음에도 수많은 사람은 어떠한 이유로 투표 행위를 포기하는 것일까?

물론 투표 행위를 강제하기 위해 투표를 국민의 의무로 규정하고 투표 기권자에게 벌금을 매기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기권하는 것도 시민 의사의 표현이며 기권율은 도리어 민의를 표시하는 또 다른 신호가 된다고도 볼 수 있다.

최근의 투표율 하락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걱정할 만큼 심각하다는 지적이 있다. 사람들이 투표에 참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고, 투표를 의무로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어떤 상반된 주장과 논거가 가능한지 살펴보자.

▶찬성 논거

민주주의는 ‘사람들의 투표를 얻기 위한 경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 경쟁 과정에서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다수가 선호하는 대표자가 선출됨으로써 대의 민주정치는 정당성을 갖게 된다. 오늘날 투표율 제고를 위한 방법으로는 투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안과 투표를 의무로 규정하는 방안이 있다.

투표 의무제를 실시하고 있는 나라는 이미 오스트레일리아, 벨기에, 그리스, 스위스, 칠레, 아르헨티나, 싱가포르 등 20여 개국에 이른다. 최근 국내 재·보궐선거 투표율은 20%대로 떨어지는 상황. 저조한 투표율을 수수방관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행위이다.

‘대의민주정치는 투표로 말한다’는 말도 있다. 현실 정치가 만족스럽다고 하지 않을 지라도 적극적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유권자의 책임 아니겠는가?

▶반대 논거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 보장을 가장 큰 가치로 여기고 있다. 따라서 ‘투표 권리’를 시민에게 ‘의무’로 강제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투표할 권리와 더불어 투표하지 않을 자유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투표를 강제하는 행위는 시민들의 또 다른 정치적 의사 표현을 억압하는 행위가 된다.

시민들이 투표에 나서지 않는 이유는 ‘효능감’(자신의 참여행위가 최종 의사결정에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끼치는가를 개인이 느끼는 정도)과 관계가 깊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면서 의사결정에 참여했을 때, 집단으로부터 적절한 반응을 얻지 못하거나 자신의 의사와 다른 결과가 빈번하게 나타났을 경우에는 효능감이 저하된다. 이때 유권자는 의도적 무관심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출할 수 있다. 투표 행위를 강제하기에 앞서 정치 현실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하며, 기권도 정치적 의사 표현의 방법임을 인정해야 한다.

‘투표 행위는 유권자의 당연한 의무’라는 당위성을 전제로 한 토론은 현실의 복잡한 문제를 간과한 것이다. ‘민주주의와 선거 제도는 100% 정당하다’는 전제에선 자유로운 토론에 도달하기 어렵다. 기본 전제부터 의심하면서 또 다른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우선 선거제도의 불합리성을 들 수 있다. 선거를 통해 대표자가 선출되는 구조에서는 본질적으로 1위가 독식을 한다(물론 중·대선거구제도는 2∼4명을 단일 선거구에서 선출하고, 정당의 득표율에 따라 비례대표를 배분하여 사표(死票)를 방지하기도 한다). 선거제도가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편리한 제도이기는 하지만 완벽한 제도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합리적 무지(rational ignorance)’라는 이론도 있다. 경제학 이론 중 하나로, ‘정보가 주는 혜택보다 그 정보를 얻기 위해 지출하는 비용이 더 클 경우 아예 정보를 얻지 않고 무시해 버리는 것이 경제적으로 합리적이라고 판단하는 현상’을 말한다.

합리적 무지는 선거나 투표를 앞둔 유권자들에게도 발생할 수 있다.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 관련된 정치상황이나 후보들에 대해 정보를 얻으려고 애쓰기보다는 차라리 무시해 버리고 투표장에 가지도 않는 행위가 경제적으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합리적 무지는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논술은 개방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규범적인 글은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기도 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오만하다’는 느낌을 들게도 만든다.

투표율 저하 현상에 대해 고민할 때도 마찬가지다. ‘선거에 참여해 투표하는 것은 훌륭한 시민으로서 당연한 의무’라는 당위적 시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선거제도에 관한 근원적인 의문에서 시작해 △자기 삶 속 참여의 경험 △효능감 △합리적 무지 등의 시각에서 다각적이고 깊이 있는 글을 써야 한다. 민주주의를 100% 완전하게 실현한 나라는 없는 만큼 ‘현실과 이상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에 초점을 두고 논리를 전개할 수도 있다. 분명한 원칙을 앞세우면서도 서로 다른 견해를 균형 있게 인정하는 상대주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 관련 문제

제시문의 타락한 ‘선거’ 양상을 살펴보고, ‘추첨’ 제도가 대안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건국대 2005학년도 정시]

퓽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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