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고전 문학작품 ‘춘향전’의 내용을 뒤집어 보고 또 뒤집어 보자. ‘춘향전’ 속 사랑은 과연 순수한 사랑일까? |
○ 생각의 시작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춘향과 이몽룡은 신분을 초월하여 지고지순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일까? 두 사람의 사랑을 다르게 생각해 볼 여지는 없을까? 다음 글을 읽고 춘향에 대한 이몽룡의 사랑이 과연 어떤 사랑일까 생각해 보자.
“저 계집은 무엇인다?”
“기생 월매 딸이온데, 관정에 포악한 죄로 옥중에 있삽내다.”
“무슨 죄다?”
“본관사또 수청으로 불렀더니 수절이 정절이라 수청 아니 들려 하고 관전(官前)에 포악한 춘향이로소이다.”
어사또 분부하되,
“너만 년이 수절한다고 관정 포악하였으니 살기를 바랄쏘냐. 죽어 마땅하되 내 수청도 거역할까?”
춘향이 기가 막혀,
“내려오는 관장마다 개개이 명관이로구나. 수의사또 듣조시오. 층암절벽 높은 바위 바람 분들 무너지며, 청송녹죽 푸른 남기 눈이 온들 변하리까? 그런 분부 마옵시고 어서 바삐 죽여주오.”
어사또 분부하되,
“얼굴 들어 나를 보라.”
하시니, 춘향이 고개 들어 대상(臺上)을 살펴보니 걸객으로 왔던 낭군, 어사또로 뚜렷이 앉았구나.
○ 뒤집어 보자
이몽룡은 능청스럽게도 춘향의 정절을 시험하고 있다. 과연 이런 행위를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한 여자가 목숨을 걸고 자신에 대한 신의(사랑)를 지켜 주었다. 그런데 그 여자를 다시 한 번 시험하다니. 도대체 이몽룡의 이런 행위는 무엇을 시험하고 무엇을 드러내기 위한 것일까?
목숨을 건 춘향의 사랑은 이미 충분히 증명되었다. 따라서 이몽룡의 이런 물음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나는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사랑을 받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다”는 자기 과시 말이다. 그런 말을 자기 입으로 말하기는 쑥스러워 춘향의 입을 통해 말하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발칙하다 느낄 수 있겠지만 이런 생각을 해 볼 수도 있다. 만약 춘향이 어사가 이몽룡인 줄도 모르고 그에게 “수청을 들겠다”고 대답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춘향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었던 희망-이몽룡이 나를 구해줄 것이라는-은 사라졌다. 이제는 죽을 일만 남았다. 내가 죽으면 서방님(이몽룡)은 우리 어머니의 구박 속에서 살 것이다. 일단 수청을 들고 내가 살아남아 우리 서방님을 재기시키자. 그의 집안이 풍비박산 되었다고 하니 이제는 오직 나만이 그의 희망이다.’ 만약 이렇게 생각한 끝에 수청을 허락했다면 춘향은 나쁜 여자일까?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몽룡은 춘향에 비해 이기적인 사랑을 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와 유사한 관점이 다음 시에도 보인다.
믿고 바라고 눈 아프게 보고 싶던 도련님이
죽기 전에 와주셨다, 춘향은 살았구나.
쑥대머리 귀신 얼굴 된 춘향이 보고
이 도령은 잔인스레 웃었다. 저 때문의 정절이 자랑스러워.
“우리 집이 팍 망해서 상거지가 되었지야.”
틀림없는 도련님 춘향은 원망도 안했니라.
오! 일편단심.
모진 춘향이 그 밤 새벽에 또 까무라쳐서는
영 다신 깨어나진 못했었다. 두견은 울었건만.
도련님 다시 뵈어 한은 풀렸으나 살아날 가망은 아조 끊기고
왼몸 푸른 맥도 홱 풀려 버렸을 법
출도 끝에 어사는 춘향의 몸을 걷우며 울다
“내 변가(卞哥)보다 잔인무지(殘忍無智)하여 춘향을 죽였구나.”
오! 일편단심.[김영랑, ‘춘향’에서]
○ 한 번 더 뒤집어 보자
그러면 이몽룡은 정말 이기적이어서 춘향을 시험했다고만 생각해야 할까? 아니다. 사회구조적인 관점에서 또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신분이 모계(母系)로 세습되었다. 아버지가 양반이라도 어머니가 천민이면 자식은 양반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2세들을 위해서는 춘향이 면천(免賤)하여 양반이 되어야 한다.
혹시 이몽룡은 이것을 노린 것이 아닐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춘향의 정절이 만천하에 빛나게 함으로써 어떤 명분을 쌓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정절을 가진 춘향이라면 당연히 면천의 자격이 있고, 따라서 나와 춘향 사이에 태어나는 자식들도 양반의 신분을 가져야 한다’는 명분 말이다.
실제로 작품의 결말을 보면 춘향은 임금에게서 ‘정렬부인’으로 봉해지고 그 자식들도 모두 출세하여 높은 벼슬을 지낸다. 어쩌면 이몽룡은 춘향이 절대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믿었기에, 자신이 욕먹을 각오를 하고 그녀의 정절을 시험하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춘향의 정절을 더욱 빛나게 해 주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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