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중학생 수리 논술]무궁무진한 ‘역사속의 수학’

  • 입력 2008년 1월 7일 02시 53분


《수학은 주어진 상황에서 수학적 요소를 이끌어내 분석, 종합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중시한다. ‘현실주의적인 수학교육’을 주장한 네덜란드의 수학자 프로이덴탈은 자연현상이나 경제현상을 함수관계로 파악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기술하는 활동 속에서 수학의 본질을 찾는 작업을 강조하였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실제 상황은 수학을 학습하는 데 중요한 재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에 근거한 역사를 통해 수학을 학습하자’는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역사 속 사건을 통해 수학적 사고력을 키우면 선조들의 지혜와 슬기를 배울 뿐 아니라, 역사라는 ‘살아있는 재료’를 매개로 해 수학의 문을 열 수 있는 것이다. 흥미진진한 역사 속 상황들에서 수학이 어떠한 역할을 했고 또 어떤 힘을 발휘했는지를 살펴보자. 만약 수학이 없었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도 함께 생각해 보자. 군량미를 계산하는 데 사용되는 간단한 식에서부터 군사행렬의 속도 계산, 포탄이 그리는 이차함수 그래프까지 ‘역사에 숨어있는 수학’을 통해 역사와 수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될 것이다.

김형진 영재사관학원·수학영재만들기 대표 원장》

15만 당나라군, 5만명 죽고 식량은 절반 불타… 언제 철군할까?

문제[1]

645년 6월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의 안시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격해 왔습니다. 당시 안시성 인구는 10만 명에 불과했는데 공격해온 당나라 군사의 수는 15만 명이나 되는 대군이었습니다. 안시성에 도착한 당나라 군사가 토산을 쌓아올린 뒤 군량미를 점검하였더니 모든 군사가 100일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안시성에서 불화살이 날아왔습니다. 불화살 공격에 식량의 절반이 타버렸고, 5만 명의 군사가 죽었습니다.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 장군은 당나라 군사의 피해 정도를 전해 듣고는 고구려 군사들에게 말했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남은 식량으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성문을 굳게 지키기만 한다면 이번 전쟁은 우리의 승리가 될 것이다.”

양만춘 장군의 예상대로였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남은 군사가 퇴각할 때 필요한 식량 10일분만 남게 되자 안시성을 포기하고 철군하였습니다. 고구려의 불화살 공격 이후 당나라 군사가 철군하기까지 며칠이 걸렸을까요?

■ 선생님의 도움

① 계획: 문장이 의미하는 내용을 파악하여 식을 세웁니다.

② 실행: 1만 명 군사가 1일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을 A라고 하면 15만 명의 군사가 100일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의 양은 1500A입니다. 식량의 절반이 불에 타버렸으므로 남은 식량은 1500A÷2=750A이고, 남은 군사는 15만-5만=10만이므로 하루에 10A의 식량을 먹습니다. 따라서 당나라 군사 10만 명이 750A÷10A=75(일)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이므로 퇴각할 때 필요한 식량 10일 분이 남은 75-10=65(일) 후 철군하였습니다.

③ 반성: 주어진 상황에 맞는지 다시 한 번 돌아봅니다.

문제[2]

612년 1월 수나라의 113만 대군이 고구려를 침공해 왔습니다. 을지문덕 장군은 거짓 항복을 하고는 고구려왕에게 항복한 사실을 아뢰겠다며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 후 고구려 군대는 수나라 군사들이 지치도록 하기 위해 싸우다가 달아나기를 여러 번 하였습니다. 지칠 대로 지친 수나라 군사가 평양성 밖 12km 되는 지점에 다다랐을 때,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의 대장에게 시를 한 편 보냈습니다.

수나라 대장은 을지문덕 장군의 항복이 거짓이며 수나라 군사가 많이 지쳐 있음을 느끼고는 퇴각을 명령하였습니다. 수나라 군사는 20m/분의 속력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는데, 퇴각하는 군사 행렬은 그 길이만 1km가 되었습니다. 수나라 군사의 선봉이 폭이 1km인 살수를 3km 앞두고 있을 때가 오전 9시였습니다. 을지문덕 장군이 미리 둑을 쌓아 강물을 막아 두었기에 살수의 수심은 얕아져 강을 건널 때의 속력은 육지에서의 속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군사가 모두 살수를 건너고 있을 때 둑을 터뜨려 몰살시킨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둑은 수나라 군사가 진행하는 경로에서 상류 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설치하였고, 둑을 터뜨리면 물은 500m/분의 속력으로 밀려간다고 합니다. 을지문덕 장군이 둑을 터뜨려야 할 시각은 언제입니까?

문제[3]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끈 을지문덕 장군은 조정에 승리를 알리기 위해 다음 날 아침 파발꾼을 수도인 평양성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평양성까지는 7일이 걸리고 가는 동안에는 식량을 보충할 수 없다고 합니다. 식량은 한 사람이 4끼 분량만 가지고 갈 수 있으므로 짐꾼을 몇 명 데리고 출발하려고 합니다. 식량을 아끼기 위해 저녁에 한 끼만 먹기로 하였을 때, 파발꾼과 짐꾼이 하루라도 식량을 먹지 못하는 날이 없도록 하려면 짐꾼을 최소 몇 명 데리고 출발해야 합니까?

문제[4]

선조 24년인 1591년 2월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은 항상 왜군의 움직임을 파악하면서 머지않아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을 예상하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군비 확충과 군사들의 훈련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왜군의 침입에 맞설 군사들을 만들기 위해 격일로 군사 훈련을 강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없는 상황에서도 격일로 고된 훈련을 받아야 하는 군사들은 불만이 커졌습니다. 군사들의 불만을 전해 들은 이순신 장군은 훈련하는 날 아침 훈련장 입구에 다음과 같은 공고문을 붙였습니다.

이런 난해한 공고문을 본 군사들은 좋아할 수도, 불평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 공고문대로 훈련을 한다면 내일부터 300일 동안 쉬는 날은 모두 며칠입니까?

문제[5]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고 1년 뒤인 1592년 4월 13일 드디어 거북선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완성된 거북선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하여 수군 진영에 정박해 있는 거북선을 타고 섬진강을 따라 현재 남해대교가 있는 위치까지 내려와 훈련을 했습니다. 훈련이 끝난 뒤 이순신 장군은 다시 거북선을 타고 수군 진영까지 복귀하기로 했습니다. 강을 따라 배를 저어 훈련지까지 내려오는 데 1시간 40분 걸렸고, 훈련을 끝내고 다시 수군 진영까지 올라가는 데 3시간 걸렸습니다. 수군 진영에서 배를 젓지 않고 강의 흐름에 따라 배가 내려온다면 훈련지까지 도착하기까지는 몇 시간 몇 분이 걸리겠습니까?

문제[6]

거북선이 완성된 다음 날인 1592년 4월 14일, 이순신 장군이 예상했던 대로 왜군이 조선을 침략해 왔습니다. 이것이 조선 역사 전반에 걸쳐 가장 참혹했던 국난인 임진왜란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선봉으로 출격하였습니다. 옥포의 첫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당포, 당항포 등지에서 계속 큰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1592년 7월 6일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서 거북선으로 학익진을 펼쳐 왜군을 포위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전투 막바지에 적장이 탄 배를 찾아 보니 적장의 배는 거북선으로부터 남쪽으로 60m 거리에 있었고, 두 군함 사이에는 높이가 14m인 아군의 배가 한 척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수면으로부터 1.5m 높이에 놓여 있는 화포를 발사했습니다. 화포는 남쪽 방향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아군 배의 꼭대기를 간신히 넘어 적장이 탄 배의 갑판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아군의 배로부터 남쪽으로 9m 떨어진 곳에 높이가 12m인 아군의 배가 한 척 더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배는 높이가 14m인 배와 왜군의 배 사이에 일직선으로 놓여 있어 이를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쏜 화포에 아군 배는 파손이 되었을까요? (단, 모든 배의 갑판의 위치는 수면으로부터 1.5m이고, 배의 높이는 해수면에서 돛대 꼭대기까지입니다.)

[정답]

2=12시 10분 3=2명 4=120일 5=7시간 30분

6=파손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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