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아기를 빼앗듯 안고 가서 우유를 주고 기저귀를 갈고 낮잠을 재웠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울면서 ‘어머니가 나에게 아기를 안 준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어머니는 당신이 힘들까 봐 도와주는 것’이라고 설명해 줬습니다. 그때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어머니의 그런 행동이 한국인의 ‘정(情)’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지난달 대한YWCA가 주최한 다문화가정 백일장에서 경기 안산지역 대상을 받은 페루 출신의 베로니카 씨는 한국의 가족문화를 “엄하지만 따뜻하다”고 설명했다.
한국에 온 지 5년 된 그는 “어머니가 젓가락질하는 법을 가르쳐 줘서 지금은 ‘기름 묻은 마늘’도 집을 수 있는 실력이 됐다”면서 웃었다.
○‘한국 사람이 되라’는 요구만 하는 가족
결혼이주여성은 한국에 오면서 자신이 익숙해 있던 질서와 전혀 다른 환경에 처하게 된다. 언어소통과 사회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남편과 시부모를 포함한 가족은 이들에게 한국 생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경북여성정책개발원이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한국에서 가장 의지하는 대상’을 조사한 결과 78명(62%)이 가족을 꼽아 동향 친구(13%), 자원봉사자(7%)보다 월등히 높았다.
대한YWCA의 조사에서도 이주여성들은 ‘공부할 수 있도록 가장 많이 도와준 사람’으로 남편과 시어머니를 꼽았다.
그러나 가족은 이주여성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인 동시에 심각한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다문화가정의 이혼은 2003년 2784건에서 2006년 6187건으로 2.2배 늘었다. 같은 기간 전체 이혼 건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5%에서 4.9%로 증가했다. 이혼의 가장 큰 원인은 가족의 무시와 이해 부족(68%)이었다.
베트남 출신 흥(38·전남 함평군) 씨는 아예 가족들 앞에서 베트남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시어머니는 TV에서 후진국 뉴스가 나올 때마다 ‘너희 나라도 저렇게 못 사느냐’고 물으세요. ‘한국 사람이 되라’고 요구만 할 뿐 제가 태어나서 자란 곳에 대해서는 관심도 흥미도 없는 가족들이 섭섭합니다.”
○지역사회의 소극적 수용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지역사회가 이주여성을 바라보는 눈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해 최훈석 성균관대 심리학과 교수가 이주여성이 많이 거주하는 경기 안산시 및 전남 영암군 지역주민 45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 대다수 주민은 이주여성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호의적 태도는 적극적인 친교로 이어지지 못하고 ‘어차피 한국 사람과 결혼해서 같은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소극적인 수용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정으로 활동영역이 한정된 대다수 이주여성은 집 밖을 나서면 친교의 폭이 제한된다. 지역에서 운영하는 언어·문화 프로그램에 참석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주민들과 사적인 교류를 쌓을 기회가 별로 없다. 주민 교류가 비교적 활발한 농촌에서도 이주여성의 지역사회 활동은 저조한 편이며 다문화가정 간 교류조차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양애경 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주여성을 적극 포용하지 않는 지역사회와 이주여성의 가정 밖 활동을 반기지 않는 가족 분위기가 맞아 떨어지며 생긴 현상”이라며 “이주여성에게 주민자치위원회, 부녀회 등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서 지역사회의 일원이라는 책임의식을 심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 적응은 ‘동행의 길’
“인터넷에 접속하는 시간은 데이트 시간이지요. 한 글자씩 열심히 배워 가는 아내를 보면 사랑이 커집니다. 아내가 공부하고 싶다면 계속 시켜줄 생각입니다. 검정고시를 봐서 대학까지 갔으면 좋겠어요.”
김동식(32·전남 담양군) 씨의 아내 윤주희(25) 씨는 지난해부터 집에서 한국디지털대 무료 온라인 강의를 통해 한국어 교육을 받고 있다. 지차제가 운영하는 한국어 교실이 집에서 멀어 온라인 강의를 택했다.
김 씨는 베트남 출신 아내가 인터넷 강의를 들을 때마다 언제나 옆을 지켜 준다. 한국 생활 적응은 아내 혼자에게만 주어진 짐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나눠져야 할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디지털대가 마련한 오프라인 교육 설명회까지 아내와 함께 참석하는 열성 남편이다.
아내의 온라인 강의가 끝나면 이제는 김 씨 차례다. 그는 이 사이트에서 조만간 개설할 베트남 문화와 역사 교육 프로그램을 수강할 계획이다.
아내 윤 씨는 “남편은 ‘빨리 한국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고 적응 과정에 동참해 주는 고마운 사람”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교육인적자원부 조사에 따르면 지자체와 지역시민단체가 운영하는 다문화가정 교육·지원 프로그램은 매년 20%씩 늘고 있다. 초기에는 외국인 여성노동자를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다가 결혼이주여성이 늘면서 다문화가정으로 교육 방향을 바꾼 단체가 대부분이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가 서울 종로구와 함께 운영하는 ‘결혼이주여성 요리교실’은 올해부터 한국 음식뿐만 아니라 이주여성 출신 국가의 음식을 만드는 프로그램도 개설할 계획이다. 지역주민들이 “이주여성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음식을 함께 만들어 먹는 것이 최고”라고 제안해 왔기 때문이다.
박희진 이주여성인권센터 사무국장은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가족과 지역사회의 반응은 무지, 이해, 동행의 3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지금 우리는 2단계의 초기 상태에 있다”면서 “교육·지원 프로그램이 이주여성의 한국화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상호 이해를 촉진하는 식으로 개편돼야 한다”고 말했다.
다문화가정 주요 교육 지원 상담 기관 자료: 교육인적자원부 | |
지역 | 기관 |
서울 |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푸른시민연대, 결혼이민자연대 서울센터, 한국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
부산 | 부산여성회, 부산동래여성인력개발센터, 외국인의 집 |
대구 | 남산기독교사회복지관, 대구가톨릭근로자회관, 불교사회복지회, 한우리가족사랑센터 |
인천 | 한국여성의 전화, 여성복지관, 조이하우스 |
광주 | 광주북구여성인력개발센터, 여성발전센터 |
대전 | 대전이주노동자연대, 외국인이주노동자종합지원센터 |
울산 |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울산지부 |
경기 | 안산 외국인노동자센터, 의정부이주노동자상담소, 의정부외국인근로자센터, 부천노동복지회관 |
강원 | 강원대국제봉사협력단, 강릉YWCA,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동해지부, 고성군사회복지협의회 |
충북 | 충북이주여성인권센터, 옥천한국어학당, 충청북도여성단체협의회, 충북외국인이주노동자지원센터 |
충남 | 아산시여성단체협의회, 청양군여성단체협의회, 당진문화원, 아산우리가족상담센터, 천안외국인쉼터 |
전북 | 완주군여성단체협의회, 부안군여성농업인센터, 군산여성의전화, 전주아시아노동인권센터 |
전남 | 외국인주부쉼터, 나주여성상담센터, 나주시여성단체협의회, 영암이주여성센터 |
경북 | 포항여성회, 구미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 아름다운가정만들기, 경주외국인상담센터 |
경남 | 거제YWCA, 산청군여성단체협의회, 함양시민연대, 거창YWCA |
제주 | 제주여성인력개발센터, 여성교육문화센터 |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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