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시스템 실패 전형 ‘대불산업공단 전봇대’

  • 입력 2008년 1월 26일 02시 49분


‘고객’ 개념 없는 꽉막힌 행정서비스

“기업은 냉장고 하나를 팔아도 고객 불만이 없는지 사후에 확인합니다. 5년간 제기된 고객 불만을 해결하지 못했다면 그 기업은 이미 망했을 겁니다.”

전남 영암군 대불국가산업단지 입주기업의 발목을 잡아오던 ‘전봇대 민원’이 5년 만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대불산단 전봇대’는 국가 행정시스템의 실패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정부, 지방자치단체, 한국전력공사 모두 법규에 충실했고 무슨 규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기업 활동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경숙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은 21일 인수위 회의 때 “실질적 전봇대뿐 아니라 마음의 전봇대를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 곳곳에 법과 규정으로 된 전봇대만큼이나 ‘생활 속 관행의 전봇대’도 많음을 지적한 것이다.

○ “행정 서비스에 고객이 없다”

대불산단의 ‘전봇대 민원’은 2003년 처음 제기됐다. 공단 내 도로변의 전봇대와 전깃줄이 대형 선박 블록을 싣는 트럭의 통행을 방해해 비용과 시간 부담이 크다는 것.

문제는 전깃줄을 땅에 묻는 지중화 사업비 80억 원. 전남도와 영암군이 지중화 사업비의 절반을 대야 하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아 사업이 찔끔찔끔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올해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질책이 나오기 전까지 네 차례의 지중화를 추진해 전봇대 364개 중 30%인 133개만이 치워졌다. 대형 선박 블록을 옮기기 위해 먼 길로 돌아가거나 전깃줄을 끊는 비용은 고스란히 기업의 몫이었다.

전문가들은 고객인 공단 입주기업의 불편과 비용을 고려하지 않는 행정 프로세스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춘근 LG경제연구원 상무는 “고객 지향 마인드가 부족해서 생긴 문제”라며 “전봇대 이전 비용과 이전으로 고객이 얻는 편익을 비교해 시장원리에 따라 비용 분담 기준을 마련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 “반응 속도가 느리다”

정부와 지자체가 공단의 환경 변화를 파악하고 신속하게 대처했다면 민원이 발생하기 전에 선제적 대응도 가능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불산단은 1997년 자동차 부품, 조립금속 업체가 들어선 중국과 동남아 시장 수출 전진기지로 조성됐다. 대형 화물을 실어 나를 일이 드물어 지중화 선로 대신 비용 부담이 적은 지상 전봇대가 세워졌다.

하지만 2000년 이후 조선업체들이 입주하면서 산단의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다. 대형 선박 건조를 위한 107m급 크레인 증설을 위해 고도 제한을 풀고, 대형 선박용 블록의 하중을 견디도록 교량을 보강해 달라는 ‘제2의 전봇대 민원’도 잇따라 제기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전남도는 지난해 ‘조선산업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는 계획까지 밝혔지만 현장에서는 기업의 고충이 방치되고 있었다. 영암군도 뒤늦게 ‘기반시설 리모델링 방안’을 내놨지만, 예산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원스톱 헬프 데스크가 없다”

기업의 고충을 신속하게 처리해주는 ‘헬프 데스크(help desk)’가 없는 점도 기업의 불편을 가중시킨다. 공단 조성은 정부가 했지만, 공단 관리를 분야별로 여러 기관이 맡아서 하다 보니 민원을 책임지고 해결할 창구가 마땅치 않았다는 것.

김유환 이화여대 법대 교수는 “정부가 맘에 들지 않으면 기업도, 국민도 떠나는 경쟁시대”라며 “여러 기관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기업 민원을 해결해 주는 ‘옴부즈맨 시스템’이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최병대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기관의 이해가 충돌하는 민원을 매년 선정해 각 기관이 수요자 처지에서 머리를 맞대고 푸는 노력을 해야 한다”며 “문제가 반복되는 부처와 담당 공무원에게 감점을 주는 평가시스템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처벌 위주의 감사 시스템이 ‘복지부동 공무원’을 만든다는 지적도 있다. 최운열 서강대 부총장은 “공무원이 현장의 필요성에 공감해도 법적인 근거가 없으면 일을 하지 않는다”며 “법규에 명시되지 않은 일은 챙기지 않도록 만드는 ‘열거주의의 폐해’부터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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