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맨큐의 경제학’에 나오는 얘기다.
저자인 하버드대 그레고리 맨큐(경제학) 교수는 재산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일화를 소개했다. 하지만 이 사례는 규제가 낳은 다른 결과를 잘 보여준다.
규제에는 ‘감춰진 조세(Hidden Tax)’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세금처럼 순기능과 함께 역기능도 있다. 지난해 말 현재 정부에 등록된 규제는 5000여 건. 하지만 등록되지 않고 숨어있는 규제만 3000건이 넘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납세자의 지갑에서 세금이 나가듯 이들 규제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은 알게 모르게 많은 비용을 치르게 된다.
○ 생활을 지배하는 규제
지난해 7월 미국 뉴욕에 출장을 갔던 회사원 김모(35) 씨는 귀국에 앞서 유아용품 전문점인 베이비저러스 매장에 들렀다. 갓 돌이 지난 아들에게 장난감을 사주기 위한 것. 아내가 사다 달라고 신신당부한 스포이트 형태의 ‘유아용 해열제’도 쇼핑 카트에 넣었다.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밟다가 최근 잠시 귀국한 곽모(34) 씨. 그는 얼마 전 저녁 때 몸살 기운을 느끼고 집 앞 편의점에 들렀다. 선반을 구석구석 둘러봤지만 타이레놀은 없었다. 점원에게 묻자 돌아온 대답. “없는데요. 약국으로 가셔야죠.” ‘아! 여긴 한국이지.’ 곽 씨는 뒤늦게 깨달았다. 점원이 알려준 인근 약국에 갔지만 이미 문을 닫았다.
김 씨와 곽 씨의 사례는 양국의 다른 규제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의사의 처방이 필요 없는 단순 의약품도 약국에서만 팔도록 규제하고 있다. 반면 미국에는 이런 규제가 없어 슈퍼마켓은 물론이고 유아용품 전문점에서도 해열제 등을 살 수 있다.
곽 씨가 늦은 시간에 편의점을 거쳐 약국까지 가야 했던 노력, 두통을 참아가며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린 고통은 한국의 ‘독특한’ 규제 때문에 치른 비용인 셈이다.
한국의 의료기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안경사가 아니면 안경점을 열 수 없다. 안경사라도 1개 영업소만 개설할 수 있으며 법인 형태의 안경업소를 개설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안경업’이 영리만 추구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거나 무자격자의 안경 제조 행위를 방지해 국민의 보건을 보장한다는 명분이다. 하지만 소비자는 유통 과정의 단순화, 대형화에 따른 원가절감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정부의 규제로 인해 치러야 하는 사회적 비용인 셈이다.
등록 규제 상위 20개 부처2008년 1월 현재. | |
부처 | 등록 규제(개) |
건설교통부 | 692 |
보건복지부 | 582 |
금융감독위원회 | 472 |
재정경제부 | 412 |
환경부 | 365 |
해양수산부 | 332 |
농림부 | 281 |
산업자원부 | 265 |
노동부 | 200 |
교육인적자원부 | 165 |
정보통신부 | 149 |
행정자치부 | 140 |
문화관광부 | 130 |
공정거래위원회 | 113 |
식품의약품안전청 | 107 |
경찰청 | 97 |
과학기술부 | 91 |
소방방재청 | 89 |
법무부 | 70 |
산림청 | 69 |
자료: 규제개혁위원회 |
○ 규제비용을 돈으로 환산하면…
한국경제연구원의 이주선 규제개혁센터 소장은 “규제가 신설되거나 강화되면 규제의 영향을 분석해 정부에 제출해야 하지만 제대로 분석한 사례는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규제가 유발하는 사회경제적 비용을 정확하게 계산하기 쉽지 않지만 규제를 만드는 비용과 집행하는 비용, 국민이 규제에 순응하거나 또는 우회하는 비용 등이 막대하다는 데 반론을 제기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그래도 규제비용을 계산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한국행정연구원이 지난해 국무조정실 규제개혁기획단에 제출한 ‘전략과제 규제개혁의 경제적 효과 분석’ 보고서가 이런 사례다. 규제개혁기획단이 개혁을 추진한 48개 규제 중에서 효과를 수치화할 수 있는 27개를 분석한 결과 규제개혁을 통해 정부 기업 가계가 절감한 비용은 2조216억 원으로 추산됐다.
피부에 좀 더 와 닿는 조사도 있다. 주로 투자 유치를 원하는 지방자치단체의 현장조사들이다. 경기도는 지난해 3월부터 5월까지 2개월간 60개 기업을 조사해 각종 수도권 규제 때문에 53개 기업의 51조3436억 원의 투자가 지연되고 있다고 밝혔다. 규제가 완화돼 이들 기업의 투자가 실현될 때 고용창출 예상 인원은 3만7582명. 노무현 정부가 일자리 창출 목표로 내세웠던 연간 30만 개의 10%가 넘는 일자리다.
물론 “지자체의 이해관계가 걸린 탓에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긴 하지만 규제로 잃어버리는 ‘기회비용’을 가늠하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현 정부가 수도권 집중을 억제하고 국토의 균형 발전을 유도한다는 취지로 고수한 수도권 규제 때문에 국가적으로 막대한 비용을 치른 것이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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