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곁의 ‘전봇대’들…태안 방제 새길 내는데도 절차타령만

  • 입력 2008년 1월 26일 02시 49분


“공산당 연상 빨간색 간판 안돼”

#서울에서 치킨집을 시작하려는 박모(40) 씨. 그는 매운맛을 강조하려고 간판을 빨간색 위주로 꾸밀 작정이었다. 그러나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 때문에 포기했다. 이 법은 빨간색이나 검은색이 간판의 50%를 넘을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행정자치부 관계자는 “빨간색은 공산주의, 검은색은 죽음을 연상시켜 1950년대부터 관행 반 규정 반으로 금지해 오다 법으로 금지한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영화관은 유해…학교 옆 불허”

#대전의 새로운 주거지역으로 떠오른 동구 가오지구. 이곳 가오중학교 인근에 최근 복합영화관이 들어서려다 중단됐다. 관할 교육청이 “복합영화관은 청소년 유해시설”이라며 막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지구 내 편의시설이 부족하다”며 복합영화관을 원했지만 교육청은 요지부동이다. 하지만 인근 학원 건물에는 호프집, 전화방, 단란주점 등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아는 업체에 공사 맡기면 허가”

#수도권에서 아파트를 지으려던 건설업체의 A 사장은 최근 한 교수를 찾아갔다. 그 교수는 인허가와 관련된 8개 심의위원회 중 한 위원회의 위원. 그 교수가 계속 문제 제기를 해서 부탁하려고 한 것. 그런데 그 교수가 “토목공사를 내가 아는 업체에 주면 심의 때 가만히 있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A 사장은 “심의를 7, 8번이나 중복해서 받는 동안 토지 매입비와 이자 비용이 치솟는다”고 말했다.》

‘빨간색은 공산당과 가깝다.’ ‘영화관은 청소년에게 해롭고 단란주점은 그렇지 않다.’

우리 생활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규제 전봇대’의 허상들이다. ‘규제 전봇대’는 심의, 검토, 평가 등 다양한 이름을 달고 있다. 이런 ‘규제 전봇대’들 때문에 외국인투자가들은 한국을 외면하고 국내 기업은 로비에 매달린다.

○ 현실 따로, 규제 따로

교육청 장학사로 일하다 최근 고등학교로 옮긴 김모(46) 교감. 그는 한 교사가 휴가를 가 빈자리에 시간강사를 구하려다 포기했다. 교육청이 지침으로 시간강사의 강사료를 시간당 1만4000원으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강사로 일할 경우 보통 하루에 2, 3시간 강의해 3만∼4만 원을 받는다. 김 교감은 “이 돈을 받고 누가 강사로 오겠느냐. 강사 구하기를 포기하고 학생들에게 자율학습을 시켰다”며 혀를 찼다.

현실과 규제가 따로 노는 것은 교육뿐 아니다.

지난해 영상물등급위원회는 외국 영화 ‘숏버스’에 대해 외설적이라며 ‘제한상영가’ 판정을 내려 이런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제한상영관’에서만 상영토록 했다. 하지만 국내에는 ‘제한상영관’ 자체가 없어 사실상 상영을 못하게 됐다. 영등위는 국내에 제한상영관이 없다는 사실도 모르고 ‘제한상영가’ 결정을 내린 셈이다.

최근 서울행정법원은 “숏버스에 대한 제한상영가 등급 분류 결정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 대형 사고에도 ‘절차 타령’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 사는 주부 박모(63) 씨는 대학병원에서 고혈압 치료를 받다 최근 집에서 가까운 개인병원으로 옮기기로 했다. 이를 위해 대학병원에 진료기록을 요청하자 병원 측은 “의사의 사인을 받아야 한다”며 담당 의사에게 예약진료를 받도록 했다.

박 씨는 “바로 복사할 수 있는 진료기록에 사인을 받기 위해 특진료를 물고 진료를 받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런 식의 전봇대는 병원뿐 아니다. 특히 대형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도 전봇대가 발목을 잡곤 한다.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한 지 5일째인 지난해 12월 12일. 양식장이 기름에 덮이자 주민들은 방제를 위해 새 길을 내야 했다. 방제 인력에게 줄 음식과 방제 도구를 실어 나르기 위해서였다.

주민들의 요청에 대해 국립공원관리공단 태안사무소는 “정식 허가 절차를 밟고 일정 기간 후 임시도로의 원상 회복을 약속해야 한다”고 밝혔다.

태안 주민 김관수 씨는 “주민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관리공단은 행정 절차만 요구했다”며 “이 때문에 방제가 1주일 남짓 늦어졌다”고 말했다.

○ 원스톱 서비스? 원 모어 스톱?

전직 장관 K 씨는 최근 “정부가 민원을 한꺼번에 해결한다는 ‘원 스톱(one stop) 서비스’를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원 모어 스톱(one more stop·한 번 더 멈춤) 서비스’인 것이 더 많다”고 말했다. 원 스톱 창구에서 해결되지 않고 관련 규제 부처를 다시 찾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절차가 한 번 더 늘어난 결과를 빚었음을 빗댄 우스개다.

삼성카드는 2005년 금융감독원의 허가를 받아 ‘채무유예서비스’를 시작했다. 이 서비스는 카드회원이 사망, 질병, 상해 등을 당했을 때 카드 결제액의 0.2∼0.3%만 받고 나머지는 받지 않거나 나중에 받는 방식이다. 다른 카드업체들도 이 서비스를 도입하려고 하자 재정경제부가 반대하고 나섰다. 재경부가 관련 규정을 검토해 “이 서비스는 보험”이라는 보험업계의 주장에 동조한 것.

이 때문에 삼성카드를 제외한 카드업체들은 이 서비스를 하고 싶어도 못하고 있다.

금감원과 재경부의 엇갈린 규정과 해석이 업체와 소비자 모두에게 혼란과 피해를 안겨 주고 있다.

○ 규제는 ‘밥그릇’

경기지역에서 아파트 분양을 준비하던 B건설은 지난해 중순 관할 교육청의 공문을 받고는 애를 태웠다. 교육청 예산이 부족해 아파트가 들어설 지구에는 2014년에나 초중학교를 개교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분양을 하려면 먼저 지자체에서 건축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학교 개교 계획이 구체화돼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육청은 “건설사가 학교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든지, 사업을 포기하든지 맘대로 하라”는 태도였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 교육청은 학교 용지를 감정가에 사들여 학교 건물을 짓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2014년에 개교한다면 분양 시기를 4년 이상 미뤄야 하는 탓에 건설업체는 교육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건설업체 관계자는 “그렇지 않아도 8가지 심의를 받느라 2005년 말로 구상한 분양 시기가 2007년으로 미뤄졌는데 또다시 4년을 미룰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분양 시기가 2년 미뤄지고 심의 과정에서 각종 요구를 수용하는 사이에 분양 원가는 1700억 원이나 추가됐다. 이는 3.3m²(1평)당 400만 원의 분양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주택 관련 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는 “통합 심의(두세 가지 심의를 한꺼번에 하는 것)가 필요하다는 데는 심의 관련 당국자들도 동의하지만 아무도 실행하지 않는다”며 “심의나 규제가 곧 ‘공무원의 밥그릇’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은우 기자 libra@donga.com

이진한 기자 likeday@donga.com

대전=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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