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 8시 반 일본 도쿄(東京) 미나토(港) 구 마쓰시타덴코(松下電工) 전자재료 영업부. 한국인 심우탁(29) 씨는 오전에 열리는 제품설명회 준비에 한창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早稻田)대 경영대학원에서 유학한 심 씨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가 유창하다. 그는 외국인 직원 중 유일하게 일본 거래처를 맡고 있다. 한국과 미국 기업을 상대하는 해외영업에도 가끔 조언한다.
오후에는 한국 대기업의 부품 수요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퇴근 즈음 상사가 부원들에게 회식을 제안했다. 술자리에서 상사는 "한국 남자들은 군대를 다녀와서인지 패기가 넘치고 조직생활에도 잘 적응한다"며 심 씨를 치켜세웠다.
같은 날 오전 8시 40분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해외영업팀 사무실. 중국인 장원(蔣雯·29·여) 씨는 출근하자마자 중국 기업에서 온 e메일에 답장을 보내느라 분주했다.
장 씨는 오전에 중국 무역회사의 서울지사를 방문한 뒤 점심 땐 한국 무역회사 마케팅 담당자들과 식사를 했다. 오후엔 중국에서 온 계약서를 검토하고 양국 기업 간 회의 진행을 맡았다. 하루 종일 중국인과 한국인 사이를 오가며 업무를 마친 시간은 오후 10시.
상하이(上海) 출신의 한류 드라마 팬이었던 장 씨는 중국에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으로 유학 온 뒤 지난해 롯데호텔에 입사해 '코리안 드림'을 이뤄 가고 있다.》
●'한중일 브레인' 대이동
한국 중국 일본 3국 간 인재들의 이동이 활발하다. 3국 간 경제 의존도가 높아진 데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 한국과 일본의 고령화로 고급 인력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중일 3국의 인재 유치 경쟁도 치열해지는 추세다.
한국무역협회가 발간한 '글로벌 인재의 이동현황과 각국의 유치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세계적으로 유사 언어권 및 문화권 내 인재 이동이 활발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동아시아 지역은 한중일 3국 간 상호 교류가 늘었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한중일 인재 교류가 각광받는 이유는 지리적으로 가깝고 한자·유교 문화권이라는 공통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비자 발급이 까다로워진 것도 한 원인이다. 한중일 인재들은 또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인종이 같아서 외모로 인해 차별당하지 않는 장점 때문에 동아시아로 몰리고 있다.
과거엔 주로 한국과 중국의 블루칼라나 저임금 인력이 경제 상황이 더 나은 국가로 이주했다. 전문가들은 최근 3국 간 브레인 이동이 늘어난 것은 한국에 이어 중국의 경제 및 교육수준 향상에 따른 결과로 분석하고 있다.
●한국 기업, '중일 브레인'에 눈뜨다
중국이 중요한 비즈니스 파트너로 부상하면서 국내 기업의 중국인 인재 수요가 급격히 늘고 있다. SK는 중국인을 앞세워 중국을 공략한다는 '차이나 인사이더' 전략 아래 지난해 중국인 신입사원 40명을 채용했다. 대부분 베이징(北京)대, 칭화(淸華)대 출신 석·박사들이다.
이 업체는 지난해 '글로벌 인턴십 프로그램'에도 21개국 165명의 외국인 학생 가운데 중국인 수가 113명에 달했다.
일본인 고급 기술 인력도 주목받는다. LG화학에서는 일본인 직원 8명이 배터리 제조기술 관련 업무를 맡고 있으며 LG필립스LCD에도 일본인 고급 기술자 3명이 재직하고 있다.
LG화학은 중국 영업 담당자와 변호사 등 중국인 9명도 채용했다. 기술 분야에선 일본인을, 영업 분야에선 중국인을 채용한 것이다.
한국에서 일하는 중국인 엘리트들의 모임인 전한국중국재직학인연합회 측은 "회원 1400여 명 중 90% 이상이 석·박사"라며 대기업과 금융권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다고 소개했다. 국재 장기체류 외국인의 취업비자를 살펴보면 연구·전문직(E1~E5) 등 화이트칼라 종사자가 중국인 1749명, 일본인 848명(2007년 12월 기준)으로 나타났다.
한편 국내 글로벌 인재의 중일 양국 진출도 활발하다. 한국산업인력공단 해외취업지원센터를 통해 기술과 전문성을 인정받은 한국인(4162명)이 2002~2006년 취업한 국가는 일본(39%), 중국(27%) 순으로 나타났다.
사설 중개업체의 소개로 양국으로 나간 인재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인크루트 등 취업정보 사이트에는 중국과 일본 현지채용 게시판이 따로 마련돼 있으며 IT기업과 무역업체의 모집 광고가 즐비하다.
●늙은 일본 '한중 젊은 두뇌' 유치
일본의 '한중 브레인' 유입은 무역이나 해외투자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일본 기업들은 일본어를 할 줄 알고 전문성만 갖추면 일본인과 똑같은 조건에서 경쟁하게 하고 있다.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이 심각한 지경이기 때문이다.
일본 법무성에 따르면 고급 인력에 속하는 기술업무 및 인문지식·국제업무 분야의 외국인 근로자 중 중국인 수가 2005년 미국인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한국인은 중국 미국에 이어 3번째다.
과학기술과 정보기술(IT) 분야의 전문 인력은 한참 모자라는 상황이다. 일본 정부는 2001년 12월 외국인 IT 기술자의 취업 기준을 대폭 완화해 글로벌 인재 유치에 적극 나섰다.
일본은 특히 한국과 중국의 IT 전문 인력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세계의 공장'에서 탈피해 산업고도화가 진행 중인 중국과 'IT 강국'으로 불리는 한국에 전문 인력이 많기 때문.
미국이나 유럽 인재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중 브레인의 임금이 싼 것도 일본 기업에 구미를 당기고 있다. 2003~2004년 소프트웨어 개발자 월 평균 급여 조사에 따르면 미국과 일본이 각각 한국보다 3.2배, 2.9배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정부는 한일 간 'IT자격의 상호인증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해 '한국 브레인'의 일본 취업을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 유학생들이 일본 대학을 졸업한 뒤 현지 기업에 취직하는 건수도 늘고 있다. 취업 목적으로 지난해 유학비자 자격 변경을 신청한 외국인 유학생은 중국이 6000명(72.5%)으로 가장 많았고 944명인 한국(11.4%)이 뒤를 이었다.
●중국, 인재 유출 속 '한일 브레인'에게 의존
우수 인재의 해외 유출에 시달리는 중국에서도 한국 일본과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양국 인재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가고 있다.
지난해 중국인사과학연구원은 중국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에서 2010년 경 325만명 가량의 인재가 부족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회계, 법무, 금융, 물류, 인터넷 분야가 심각하다고 덧붙였다.
중국이 주목하는 글로벌 인재도 '한일 브레인'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홍콩을 제외하면 미국, 일본, 한국이 3대 교역국이기 때문에 한일 양국과의 긴밀한 경제 협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중국 국무원 노동사회보장부에 따르면 2006년 취업증을 가진 합법적 외국인 근로자가 18만 명을 넘어섰다. 외국인 취업자가 가장 많은 상하이(5만4608명)의 경우 일본인(28.6%), 미국인(12.3%), 한국인(8.9%) 순이었다.
취업증을 가진 외국인 가운데 총경리(사장) 재무 인사 등 고위 관리직이 전체의 25.4%를 차지했고 고급 기술 인력도 6.1%였다. 이들의 학력 수준은 박사 2.6%, 석사 16.4%, 학사 69.4%로 고학력이었다.
●글로벌 인재로서 성공 비결은?
한중일 기업을 넘나드는 인재들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외국어 실력과 해당 분야 업무에 대한 전문성은 기본. 나아가 현지 인재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철저한 '현지화'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 경험자들의 지적이다.
일본 기업에 취업한 한국인 인재들은 일본어와 함께 영어 중국어 등 외국어 실력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영어를 잘하는 일본인이 많지 않아 유창한 영어는 분명한 플러스 요인이 된다.
일본에서 유학한 뒤 현지 회사에 취직한 인재들은 다양한 인턴 경험이 면접에서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채용에 신중한 일본 회사들은 인턴 출신 지원자를 '일본 사회를 경험하면서 한 번 걸러진 인재'로 본다.
일본 세이코에 취직한 중국 유학생 장수(張殊·여·26) 씨는 "입사 초반 일본인 특유의 완벽주의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었다"며 현지 기업 문화에 빨리 적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 기업에 취업한 중국인들은 일뿐만 아니라 '조직 생활'을 강조하는 한국 기업 문화에 당혹감을 느꼈다고 귀띔했다. 중국 회사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업무 외에는 직장 동료와 어울릴 기회가 적기 때문이다.
한국 대기업에 근무하는 한 중국인 직원은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 한국 신문과 방송을 챙겨 보고 사내 동호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는 업무 처리가 불확실해 잘못하면 덤터기를 쓸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중국 상하이의 한 상사에 근무하는 일본인 미야기 미키(宮城美希·여·35) 씨는 "중국 업체는 보고와 연락, 상담이 일본에 비해 불확실하고 중국인 직원들은 잡무를 꺼린다"고 말했다.
남원상 기자 surreal@donga.com
노지현기자 isit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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