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죽음으로 내몬 한국이 저주스럽습니다”

  • 입력 2008년 1월 27일 15시 29분


오정화 씨.
오정화 씨.
"대한민국이 저주스럽습니다."

최근 중국 북경대학을 졸업한 오정화(25·여)씨는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중국 교포인 정화 씨에겐 9년 전에 헤어진 엄마가 있었다.

엄마와 헤어진 것은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1999년 어느 날. 엄마는 "한국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오겠다"며 훌쩍 정화 씨 곁을 떠났다.

어린 시절 자신의 다리 수술비와 심장병 환자인 아빠의 병원비로 10만 위안(약 1000만원)의 빚이 있었는데, 엄마는 "내가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오면 빚을 갚는 것을 물론이고 중국에서 부자로 살 수 있다"고 했다.

당시 정화 씨는 몰랐다. 엄마의 살아계신 모습을 보는 게 그 때가 마지막이었다는 것을.

●'참 지독한 한국인….'

엄마 권봉옥(51·여)씨는 "한국에서 취업을 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브로커의 꾐에 빠져 일자리도 구하지 못한 채, 한국행을 위해 빚을 얻어 만들어 놓은 돈 2000만원을 사기 당했다.

'열심히 벌면 갚을 수 있겠지…'

엄마는 사기범을 원망하지 않았다. 대신 어렵사리 취직한 모텔에서 억척같이 청소 일을 하며 한 푼 한 푼 돈을 모으며 빚을 갚아 나갔다.

한국에서는 큰 돈이 아니었지만 중국의 남편과 딸이 생활하는 데는 모자람이 없었다.

'이제 몇 년 만 더 하면 다시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을 거야.'

그의 꿈은 그러나 2000년 어느 날 길거리에서 또 한번 박살났다.

지나가던 오토바이에 치어 중상을 입은 엄마는 척추 수술까지 받아야 했지만 '불법 체류자'라는 신분이 탄로날까봐 보상을 요구할 수 없었다.

치료비 때문에 되레 빚만 늘게 됐다.

●"이번 여름에 돌아갈게…"

2001년 정화 씨가 북경 사범대에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와락 안아주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엄마와 딸은 눈물로 전화기를 적시는데 만족해야 했다.

엄마는 자신이 옆에서 돌봐주지 못하는 데도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진학한 딸이 대견스러웠다고 했다.

딸 옆에 있어주지 못하는 죄책감에 엄마는 다시 한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커지는 법만 알고 작아지는 법은 모를 것 같던 빚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렇게 9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딸은 무사히 대학을 졸업해 이제는 어엿한 직장인이 됐다.

이달 14일, 엄마는 딸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얘기했다.

"정화야, 이제 빚이 거의 다 정리가 돼 가. 이번 여름에는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참, 내가 내일 생활비 40만원 입금할게."

그게 끝이었다.

엄마는 평소 돈을 보낸 뒤에는 꼭 입금 확인전화를 했는데 유독 그날은 날이 저물도록 전화가 없었다.

잠시 후,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엄마가 죽었다고 했다.

●"본인이 겁먹고 도망가다 생긴 사고"

결국 엄마가 마지막으로 송금한 40만원은 딸의 한국행 비행기표 값이 됐다.

정화 씨가 서울에 와서 들은 얘기에 따르면 엄마는 15일 오후 1시경 평소와 같이 서울 종로구 연지동 L모텔에서 8층 2호 객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그때 어수선한 발소리가 들려왔고, 불법체류 단속 반원들이 모텔에 들이닥쳤다는 것을 직감한 엄마는 황급히 객실 문을 잠갔다고 했다.

그리고 단속반을 피해 몸을 숨기려고 창 밖 창틀에 매달렸다는 것이다.

갑자기 문이 잠긴 것을 수상히 여긴 단속반원들은 10여 분 뒤 마스터키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때는 엄마는 이미 팔에 힘이 빠져 8층 아래로 떨어진 뒤였다는 것.

정화 씨는 호텔에서 창틀 세 군데에 엄마의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을 확인했다.

단속반이 떠나기만을 기다리며, 마지만 순간까지 사투를 벌인 것 같다는 게 정화 씨의 얘기다.

정화 씨는 최근 기자와 만나 부서진 휴대전화를 보여주면 울먹였다.

한국에 다시 못 올까봐, 빚을 못 갚게 될까봐, 가고 싶어도 고향에 갈 수 없었던 엄마에게 이 휴대전화는 목소리로나마 딸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다.

하지만 지금 그 휴대전화는 떨어질 때 충격으로 두 동강 나 있었다.

유품정리를 위해 권씨가 살던 지하 단칸방을 찾은 오씨는 서랍장에 있던 낡은 앨범을 보고 또 한번 가슴을 쳤다.

"엄마가 통화할 때마다 얼마나 예뻐졌는지 보자며 최근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어요. 바쁘다는 핑계로 사진을 안 보냈는데…, 엄마가 갖고 있던 앨범에는 온통 제 중학교 때 사진뿐이에요."

권씨의 추락사에 대해 법무부 출입국관리소 측은 "적법한 단속 절차를 거쳤으며 본인이 겁을 먹고 도망가다 발생한 사고라서 공식적인 사과는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정화 씨는 "한국인에게 그렇게 치이고 사기당하면서도 엄마는 선량한 한국인이 훨씬 많다고 했다"며 "이런 엄마를 죽음으로 내몬 대한민국이 저주스럽다"고 한탄했다.

김해성 목사(외국인 노동자의 집 대표)는 "중국동포를 '외국인'이 아닌 '재외동포'에 포함시키는 재외동포법 개정안이 2004년 발효 됐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행되지 않고 있다"며 "법이 제대로 적용됐더라면 권씨는 애초에 불법 체류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나성엽 기자 cp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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