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영화, 생각의 보물창고]‘베오울프’

  • 입력 2008년 2월 4일 02시 54분


《‘베오울프(Beowulf)’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영문학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게르만족의 영웅 베오울프의 일대기를 담은 이 얘기는 300여 년 동안 구전되어 온 영웅 서사시죠.

하지만 베오울프의 얘기를 스크린으로 옮긴 동명(同名)의 영화는 인류의 영웅 베오울프에 대해 삐딱한 시선을 던집니다.

영화는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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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적 영웅’ 베오울프… 세상에 100% 정의는 없는걸까

[1] 스토리라인

인간과 괴물이 공존하던 서기 507년 덴마크. 늙은 왕 ‘흐로스가’(앤터니 홉킨스) 왕이 이끄는 왕국의 백성들은 사람들을 도륙하고 인육을 먹는 괴물 ‘그렌델’ 때문에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이때 전사 베오울프(레이 윈스턴)가 나타납니다. 그는 “괴물을 죽이고 세상을 구하겠다”고 공언하죠.

베오울프는 해냅니다. 그는 괴물의 팔을 잘라 버린 뒤 괴물의 소굴까지 뒤쫓아 갑니다. 하지만 그는 난생 처음 보는 신비롭고도 간악한 존재와 맞닥뜨립니다. 바로 ‘물의 마녀’(앤젤리나 졸리)였죠. 알고 보니, 괴물 그렌델은 물의 마녀와 흐로스가 왕 사이에서 태어난 저주스러운 자식이었습니다.

베오울프는 물의 마녀와 어두운 계약을 합니다. 그리곤 그녀와 동침을 합니다. 물의 마녀는 강력한 힘을 가진 아들을 낳게 해 줄 베오울프의 ‘씨앗’이 필요했고, 베오울프는 물의 마녀가 왕국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고 왕국을 더는 유린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죠.

인간세상으로 돌아온 베오울프는 “내가 괴물과 물의 마녀를 모두 죽였다”면서 떠벌이고, 결국 흐로스가 왕에 이어 새로운 왕이 됩니다.

50년이 흐릅니다. 평화롭던 왕국은 불을 뿜는 ‘드래건’이 나타나면서 아수라장으로 변합니다. 베오울프는 천신만고 끝에 드래건의 심장을 따내지만, 결국 드래건과 함께 천길 절벽 아래로 떨어집니다.

목숨이 다해 가던 베오울프는 옆에서 함께 죽어가는 드래건을 응시합니다. 아, 죽어 가는 드래건이 점점 인간의 형상을 띱니다. 그렇습니다. 드래건은 베오울프 자신과 물의 마녀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던 것이죠.

[2] 핵심 콕콕 찌르기

베오울프는 진정한 영웅인가요?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직하지 않았고 물의 마녀를 처단할 만큼 절대적인 힘을 가지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물의 마녀와 모종의 계약을 맺었습니다. 자신의 씨앗을 마녀에게 주는 대가로 왕국을 지배할 권리를 마녀로부터 보장받은 것이죠.

영화가 던지는 핵심적인 질문이자 메시지는 여기서 탄생합니다. ‘진정한 영웅이란 있을까?’

결국 인류의 진정한 영웅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베오울프란 영웅을 창출해낸 영웅담은 베오울프 스스로 생산해낸 과장된 허풍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절대 선(善)’을 표방하는 영웅이란 것도 알고 보면 악(惡)과의 불온하고도 내밀한 거래를 통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불완전한 존재에 불과하지요.

베오울프의 권능을 의심하는 귀족 ‘운페르트’(존 말코비치). 그는 영웅이란 존재 뒤에 감춰진 이러한 그림자에 대해 “아버지들의 원죄(Sins of the fathers)”라고 일갈합니다. 여기서 ‘아버지들’이 누군가요? 그렇습니다. 왕국의 아버지들, 다시 말해 선왕인 흐로스가 왕과 그에 이어 왕위에 오른 베오울프였습니다. 이들 ‘나라의 아버지’는 마녀와의 거래를 통해 권력을 지켰던 원죄를 짊어지고 있지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생각할 여지가 많습니다. 베오울프는 인간세상의 평화와 안위를 위협하는 악마적 존재(드래건)를 처단하지만, 드래건의 정체는 무엇이었습니까? 베오울프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었습니다. 결국 베오울프는 왕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아들의 심장을 제 손으로 따야 했던 것이죠.

아, 얼마나 아이로니컬하면서도 서글픈 장면인지요. 이 영화는 베오울프라는 영웅 신화에 근본적인 물음표를 던짐으로써 그 신화를 해체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절대 선이란 없으며 세상은 악과 결탁한 위선적인 영웅들이 있을 뿐이라는 암울한 이야기를 하지요.

[3] 더 깊이 생각해 볼까?

어쩌면 영웅은 적(敵) 없이는 탄생할 수 없는 게 아닐까요? 사람들을 위협하고 그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적이 없다면, 사람들은 결코 영웅을 필요로 하지도, 영웅을 애타게 기다리지도, 영웅을 숭배하지도 않을 테니까요.

북한도 마찬가집니다. 김일성 김정일이란 국가적 ‘영웅’도 미국이란 나라 때문에 만들어졌고 또 유지되는 건지도 모릅니다. 미국을 ‘강력한 적’으로 규정하고 미국에 대한 북한 사람들의 피해의식과 공포를 조장함으로써 자신의 영웅적 지위를 더욱 공고히 다질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뒤로는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어 정권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마치 베오울프가 물의 마녀와 은밀한 거래를 맺었듯이….

[4] 알쏭달쏭 퀴즈

이 영화는 실사(實寫)영화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입니다. 수백 개의 센서가 달린 옷을 입고 배우들이 연기를 하면, 배우의 움직임을 센서가 모두 감지해 컴퓨터 그래픽(CG)으로 재현해 낸 것이지요(이를 ‘퍼포먼스 캡처’ 기술이라고 합니다). 배우들은 얼굴과 눈동자에까지 센서를 붙임으로써 표정이나 눈동자의 움직임마저 고스란히 CG 이미지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기술 덕분에 영화는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었는데요. 물의 마녀로 나오는 섹시 스타 졸리는 실제론 옷을 전혀 벗지 않았지만, 스크린으로 옮겨진 그녀의 이미지는 나체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벗지 않고도 벗은’ 효과를 낸 것이지요. 또 베오울프 역을 맡은 배우 윈스턴은 실제론 키가 178cm이지만 영화 속에선 2m에 육박하는 거구로 등장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혼란에 빠집니다. 점점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요즘 한국의 한 영화제작자는 작고한 중국의 무술스타 리샤오룽(李小龍)를 CG로 복원해 내는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만약 성공한다면, CG로 다시 태어난 리샤오룽이 ‘진짜’ 배우들과 함께 출연해 절권도를 구사하는 액션영화를 보게 될 텐데요. 자,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일까요, 실사영화일까요? 이 영화가 만약 미국 아카데미상 후보로 오른다면, CG로 복원된 리샤오룽은 과연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를 수 있을까요?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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