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아들을 정적으로 여겼다?
○ 생각의 시작
최근 조선 정조(본명 이산)를 배경으로 하는 TV 드라마와 소설이 봇물을 이루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정조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이유는 그가 정계와 학계를 모두 장악한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인 ‘군사(君師)’, 즉 ‘학자 군주’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모습은 지난해 말 있었던 대통령 선거를 전후하여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등장을 열망하는 시대상과 맞물려 들어 갔다. 실제로 영, 정조로 대표되는 18세기는 세종대왕으로 대표되는 15세기에 이어 300년 만에 정치 경제적 안정과 찬란한 문화적 성장을 이루어 조선왕조 중흥의 꽃이 활짝 핀 전성기였다.
그러나 왕조 중흥의 꽃을 피운 이 시대에 왕실에서는 아주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바로 장헌세자(훗날 사도세자)의 죽음이었다. 그동안 영조와 정조가 남긴 역사적 업적들 사이에 묻혀 사도세자에 대한 관심은 호동왕자, 마의태자, 소현세자 등과 더불어 그저 비운의 왕자 정도로만 알려져 왔다.
14년간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던 사도세자는 무슨 이유로 아버지 영조와 어긋나게 되었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까? 이러한 의문점을 여러 각도로 생각해보는 것도 영, 정조 시대의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이런 생각은 어떨까?
혹시 사도세자가 정신병자였던 건 아닐까?
사도세자가 죽은 후 그 이름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어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진실은 기록 속에서 사라져 갔다. 그 대신 세자빈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이 그 자리를 메웠다.
‘하늘이 아무쪼록 그 흉악한 병을 지어 몸을 그토록 만들려 하신 것이로다. 하늘아, 하늘아, 차마 어찌 그리 만드는가!’(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
이 글은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세자빈 혜경궁 홍씨가 피를 토하듯 써내려간 글이다. 세자의 정신병이 초래한 비극을 통탄하는 한 맺힌 부인의 기록은 후세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써내려간 ‘한중록’의 결론은 사도세자가 기행을 일삼다 결국 영조에 의해 여드레 동안이나 뒤주에 갇혀 죽은 정신병자이며 영조 역시 성격이상자라는 것이었다. 정신병과 이상 성격의 충돌이 비극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누구인가? 사도세자를 끝내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의 영수 홍봉한의 딸, 홍인한의 조카이다!
○ 뒤집어 생각해볼까?
혹시 사도세자는 성군(聖君)의 자질을 지닌 인물이었던 건 아닐까?
사도세자가 죽기 2년 전, 즉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시기에 온양의 행궁(行宮)인 온궁(溫宮)에 요양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한 군마가 마구간을 뛰쳐나가 콩밭을 상하게 하자 세자는 그 군마의 주인 위사(衛士)를 처벌하고 밭주인에게 후히 보상하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백성을 고통에 빠뜨리는 부역을 감해주라고 명령하였고, 온양 읍내의 부로(父老)들과 이름 없는 선비들을 불러 도타운 말로 학문에 힘쓸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이덕일, ‘사도세자의 고백’) |
이 글을 통해 볼 때 사도세자는 오히려 성군(聖君)의 자질을 지닌 인물에 가깝다. 또한 다른 기록에서도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무리 없이 이끌어왔고, 영민하며, 무예 또한 출중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사도세자를 미치광이로 보는 시각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 또 다른 생각은?
혹시 사도세자는 노론과 소론이 벌인 권력다툼의 희생자가 아닐까?
당시는 붕당정치가 전개되고 있었고, 집권층인 노론과 소론은 치열하게 권력을 다투고 있었다. 그리고 영조는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였기에 늘 병을 달고 살았다. 따라서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14년간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은 항상 초조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영조가 덜컥 세상을 떠나고 소론과 가까운 세자가 즉위하는 날이면 노론의 몰락은 쉽게 예견될 수 있는 일이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노론은 사도세자에 대한 집요한 공격을 시도하였고, 결국 세자를 영조에 대한 역모로 몰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나경언의 고변, 이것이 노론의 승부수였다! 나경언의 고변서에는 세자의 허물 10여 조가 낱낱이 적혀 있었는데, 고변의 핵심은 ‘변란이 호흡 사이에 있다’는 말이었다. 즉 세자가 정변을 일으키리라는 것이었다. 이 고변 직후 영조와 사도세자 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 것이다.
○ 꼬리를 무는 생각은?
혹시 사도세자는 영조의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이었던 건 아닐까?
영조에게 있어서 사도세자는 42세 늦은 나이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 세자가 성장하여 대리청정을 통해 정치적 역량이 커지자, 영조는 사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부자간의 사소한 일조차 정치적 행위로 처리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러한 영조의 처사는 영조 자신을 오랜 세월 괴롭혀 온 마음속 상처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그것은 영조 자신이 끊임없이 선왕 경종 독살설의 배후로 거론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처럼 자신과 연관된 과거사의 상처를 세자가 건드렸을 때 그 아픔은 배가 되었던 것이다. 이는 치열한 권력 다툼의 시대에 세자와 영조가 서로 다른 정견을 가진 ‘정적’임을 확인시켜주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세자가 대리청정한 지 10여 년이 지났어도 영조는 끊임없이 세자의 충성심을 확인하면서 견제하였고, 영조가 한 번 의심할 때마다 세자는 불효자 또는 죄인이 되어 조정 대신들의 구경거리가 되어야 했다. 나경언의 고변을 접한 이후에 영조가 그 배후의 불순한 의도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은 채 크게 분노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나경언이 어찌 역적이겠는가? 오늘 조정 신하들의 치우친 논의가 도리어 부당(父黨·영조의 당), 자당(子黨·세자의 당)이 되었으니, 조정의 신하가 모두 역적이다.”(‘영조실록’) |
바로 이 ‘부당’ ‘자당’이라는 말에서 세자에 대한 영조의 인식이 명확히 드러난다. 즉 영조는 세자를 자신의 정적이자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역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영조는 남달리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권력은 눈물과 인정을 넘는 것이었다.
이철광 청솔 아우름 통합논술 강사
☞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더 많은 읽을거리는 이지논술 홈페이지(easynonsul.com)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