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제1
관용 표현의 쓰임이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요즘 사업이 계속 게걸음만 치고 있다.
② 대변인은 성명서의 요지를 알기 쉽게 변죽을 치며 설명했다.
③ 김 과장은 돌아서면서도 불만스러운 듯 고추 먹은 소리를 했다.
④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아이가 벌써 결혼을 앞둔 늠름한 청년이 됐구나.
⑤ 박 선생은 오지랖이 넓어 남들 걱정은 잘하는데, 정작 자기 앞가림을 못해요.
①게걸음 치다; 옆걸음질하다. 문맥상 사업이 잘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
②변죽을 치다; 변죽은 그릇, 세간 등의 가장자리로 변죽을 치다(울리다)란 표현은 바로 말하지 않고 둘러서 말해 상대가 눈치로 알게 할 때 사용한다. 따라서 문맥상 ‘알기 쉽게’와 어울리지 않는다.
③고추 먹은 소리; 못마땅하게 여겨 씁쓸해하는 말.
④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 매우 귀엽고 사랑스럽다.
⑤오지랖이 넓다; 아무 일에나 쓸데없이 참견한다. |
□ 문제2
<보기>에 제시된 문장의 중의성(重義性)을 [ ]의 뜻에 맞게 해소하는 방법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ㄱ. 김 사장은 밝은 표정으로 환영 나온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김 사장의 표정이 밝음]
ㄴ. 철수는 이 선배와 지도 교수를 방문하여 진로 문제를 상담했다. [철수가 두 사람을 방문함]
ㄷ. 그는 조교를 통해 김 교수의 책을 전달받았다. [저자가 김교수인 책]
ㄹ. 김동규와 박은재가 올해 결혼하였다. [둘이 부부가 되었음]
ㅁ. 나는 어제 철수만 만나지 않았다. [철수를 만났음] |
① ㄱ의 중의성은 꾸밈을 받는 말의 불명확성 때문에 발생한 것인데, ‘밝은 표정으로’를 ‘사람들과’의 뒤로 옮긴다.
② ㄴ의 중의성은 목적어의 불명확성 때문에 발생한 것인데, 주어 뒤에 반점(,)을 첨가한다.
③ ㄷ의 중의성은 조사의 중의성 때문에 발생한 것인데, ‘의’를 ‘가 지은’으로 바꾼다.
④ ㄹ의 중의성은 조사의 결합 구조 때문에 발생한 것인데, ‘와’와 ‘가’를 서로 교체한다.
⑤ ㅁ의 중의성은 부정어의 부정 내용 때문에 발생한 것인데, ‘않았다’를 ‘못했다’로 바꾼다.
ㅁ은 철수만 만나지 않고 철수를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는 의미와, 철수만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는 의미, 두 가지로 해석된다. 이때 문제에서 요구한 전자의 해석대로 수정하려면 ‘철수만 만난 것은 아니다’ 정도가 적당하다. |
□ 문제3
<보기>의 ( ) 안에 들어갈 말로 적절한 것끼리 묶인 것은?
〈보기〉
· 주식 투자 손실을 부동산 매각 대금으로 ( ㉠ )하였다.
· 경찰은 이 조항에 근거하여 처벌 대상자를 ( ㉡ )하였다.
· N예술 학교는 무용 학교를 ( ㉢ )하여 그 정원이 두 배가 되었다.
· N거리 이름과 방향을 알리는 ( ㉣ )를 거리마다 설치해야 된다.
· 김 사장은 부사장에게 사업을 ( ㉤ )하고 이제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 부동산 투기 일제 단속을 벌여 불법 매매 행위를 강력히 (㉥ )할 방침이다. |
①㉠보존(保存), ㉡선발(選拔), ㉢합병(合倂), ㉣표시(標示)
②㉠보전(補塡), ㉡선별(選別), ㉣표지(標識), ㉤인수(引受)
③㉠보전(補塡), ㉢통합(統合), ㉤인수(引受), ㉥통제(統制)
④㉡선별(選別), ㉢합병(合倂), ㉤인계(引繼), ㉥제재(制裁)
⑤㉡선발(選拔), ㉣표지(標識), ㉤인계(引繼), ㉥제재(制裁)
㉠보전(補塡); 부족한 부분을 보태어 채움
㉡선별(選別); 가려서 따로 나눔
㉢합병(合倂); 둘 이상의 기구나 단체, 나라 따위를 하나로 합침. 또는 그렇게 만듦
㉣표지(標識); 표시나 특징으로 어떤 사물을 다른 것과 구별하게 함. 또는 그 표시나 특징
㉤인계(引繼); 하던 일이나 물품을 넘겨주거나 넘겨받음. ‘넘겨줌’으로 순화
㉥제재(制裁); 일정한 규칙이나 관습의 위반에 대하여 제한하거나 금지함. 또는 그런 조치 |
□ 문제4
예시문의 오류가 바르게 수정된 것을 모두 고른 것은?
예시문 | 수정 내용 | |
사장께서는 사원들의 노고를 격려하셨다. | 격려하셨다 -> 치하하셨다 | … ㉠ |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도착 시간을 지켜야 한다. | 한다 -> 한다고 했다 | … ㉡ |
이번 조치가 더 이상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헛구호로 그칠지 지켜볼 일이다. | ‘더 이상’을 삭제함 | … ㉢ |
양측은 정국 정상화 방안에도 의견을 접근한 것으로 알려졌다 | 을 -> 이 | … ㉣ |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요람이지만, 우리 민족혼의 산실이다 | -지만 -> -더라도 | … ㉤ |
①㉠,㉡ ②㉡,㉢ ③㉠,㉢,㉣ ④㉡,㉣,㉤ ⑤㉢,㉣,㉤
㉠ ‘격려하다’는 용기나 의욕을 북돋워 주는 것이므로 수고하고 애씀의 의미인 ‘노고’와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노고를 치하하다’로 고치는 게 맞다. 그러면 의미가 수고하고 애쓴 것을 고마워하여 칭찬하다가 된다.
㉡ 주어부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이므로 서술부가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로 끝나야 주어, 서술어 호응관계가 맞는다.
㉢ ‘더 이상’과 호응하는 서술어가 없다. 따라서 삭제하는 게 맞다.
㉣ ‘접근하다’는 타동사가 아니므로 목적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의견이 접근하다’가 의견이 서로 일치해간다는 의미로 맞다.
㉤ ‘요람일 뿐 아니라’ 정도가 문맥상 자연스럽다. |
[5∼7]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계몽된 현대 사회에서 이성이 설정한 최고의 목적은 ‘자기 보존’이다. 그 결과 자연은 목적 없는 단순 물질이자 자기 보존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오랫동안 자연의 지배를 받아 왔던 인간이 이제 자연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성 자체가 도구화됨으로써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자기는 사라지고 오직 비판능력 없는 추상적 자아만 보존된다. 호르크하이머는 이렇게 진행된 인간의 승리가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에 의한 인간 지배로 귀결된다고 진단한다. 이를 개념화하기 위해 그는 우선 내적 자연과 외적 자연을 구별하고 후자를 다시 인간적 자연과 비인간적 자연으로 나눈다.
인간에 의한 자연 지배가 인간에 의한 인간 지배로 진행한다는 호르크하이머의 명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먼저 인간에 의한 외적 자연 지배는 내적 자연에 대한 억압을 수반한다. 인간은 외적 자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도구적 이성의 지배를 내면화하면서 자신의 내적 자연을 억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을 기계처럼 다루듯이 자기 자신도 도구적 이성에 의해 작동되는 기계처럼 다루어야 한다. 도구적 이성으로 무장한 자아가 자신의 내적 자연을 억압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적 자연을 철저하게 억압함으로써 성공한 사람이 이제는 그렇지 못한 사람을 지배한다.
추상적 자아에 의한 내적 자연의 지배가 강자에 의한 약자의 지배 구조를 강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람들 사이의 지배 구조가 자아에게 내적 자연을 지배하도록 강제한다고 볼 수 있다. 자기 보존과 성공을 위해 인간이 자신의 내적 자연까지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공격할 수 있는 것은 냉혹한 지배자로부터 혹사당한 경험에서 벗어나려는 비극적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외적 자연에 대한 인간의 억압은 인간의 본래적 특성보다는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 외적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인간의 내적 자연을 억압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억압의 주체인 이성과 자아에 대한 ‘원한 감정’을 더 키워 간다. 특히 이중적 억압의 희생자로 전락한 다수의 대중이 원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대중은 한편으로 자신의 자연적 충동을 스스로 억압해야만 하고, 다른 한편으로 보다 성공적으로 내적 자연을 통제한 사람들에 의해 지배받는다. 이와 같이 억압받은 대중의 내적 자연이 억압의 주체인 도구적 이성에 대해 품은 원한 감정은 폭동의 잠재력이 된다. 일반적으로 원한 감정은 그것의 원인을 제거하기보다 파괴 욕구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원한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의 내적 자연을 억압하듯 타인을 공격하고 파괴하는 폭동을 일으킨다. 호르크하이머는 이를 ‘자연 폭동’이라고 부른다. 자연 폭동의 방향은 정해져 있지 않다. 파괴적 공격은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할 수도 있고 처음 본 사람을 목표로 할 수도 있다. 파괴의 대상은 이처럼 언제나 대체 가능하지만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호르크하이머는 여기서 현대의 파시즘이, 대중이 품고 있는 자연 폭동의 잠재력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적 파시즘은 내·외적 자연을 억압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체제에 자연 폭동의 잠재력을 포섭함으로써 보다 철저하게 대중을 착취한다. 예를 들어 나치는 도구적 이성에 의해 희생된 대중이 가진, 이성에 대한 원한 감정을 유대인을 향한 자연 폭동으로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러나 자연 폭동은 억압된 자연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억압을 영속시키는 데 기여했다. 도구적 이성의 전면화에 대항하는 자연적 인간들의 야만적 폭동은 표면적으로는 이성을 비하하고 자연을 순수한 생명력으로 추앙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성의 도구화를 촉진하였으며 내적 자연을 잔혹한 폭력의 주체로 발전시켰다. 이런 맥락에서 호르크하이머는 반이성적 자연 폭동은 도구적 이성의 지배를 극복할 수 없다고 본다. 이성을 거부하는 자연 폭동은 자연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족쇄를 채우는 데 이용될 뿐이기 때문이다. 족쇄에서 벗어나려면 반이성적 자연 폭동에 의하지 않고, 겉으로 보기에 자연의 대립물인 이성이 먼저 비판적 사유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
□ 문제5
위 글의 ‘자아’, ‘이성’, ‘자연’에 대한 이해로 옳은 것은?
① 외적 자연은 추상적 이성과 자아를 가지고 있다.
② 나에게 다른 사람은 외적 자연이면서 인간적 자연이다.
③ 나는 자아가 없는 내적 자연으로서 기계적으로 살아간다.
④ 과거에 자연이었던 것이 이제는 자연이 아니며 자아도 아니다.
⑤ 내적 자연이 자아를 지배한다면, 외적 자연은 이성을 억압한다.
① 추상적 이성과 자아는 내적 자연과 외적 자연을 지배하는 것으로 외적 자연에 속하지 않는다.
② 외적 자연은 인간적 자연과 비인간적 자연으로 나뉘는데, 인간적 자연은 타인을 말한다. 따라서 타인은 인간적 자연이면서 당연히 외적 자연이다.
③ 나는 추상적 자아이므로, 자아가 없는 내적 자연이 아니다.
④ 과거에 자연이었던 것은 지금도 자연이다.
⑤ 추상적 자아가 내적 자연을 지배하고, 인간이 도구적 이성을 통해 외적 자연을 지배한다. |
□ 문제6
위 글로부터 추론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인간에 의한 자연 지배는 인간에 의한 인간 지배의 또 다른 형태이다.
② 자연적 욕망을 강하게 억제함으로써 성공한 사람은 원한 감정을 갖지 않는다.
③ 다른 사람에 대한 폭력이 인간 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으로 미화될 수 있다.
④ ‘자연 폭동’은 전체주의의 실체를 밝히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의 권력을 강화한다.
⑤ 내적 자연을 통제하는 데 실패한 현대인은 외적 자연의 지배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② 자연적 욕망을 강하게 억제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간에 계몽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내적 자연을 억압한다. 내적 자연이 억압되면 ‘원한 감정’이 형성되는 것이므로 현대인은 누구나 ‘원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이 호르크하이머의 주장이다. 따라서 이것이 답이다.
③ 제시문 자체에는 이런 내용이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과연 제시문에서 이런 내용이 추론될 수 있느냐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현실이나 역사를 고려할 때 충분히 인정할 만한 주장이다.
⑤ 이성의 도구화, 추상적 자아는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보다는 인간에 의한 인간 지배로 귀결되므로, 내적 자연에 대한 통제에 실패하면 외적 자연의 지배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해석할 수 있다. |
□ 문제7
위 글에 제시된 ‘호르크하이머’의 입장에 대한 비판으로 타당한 것은?
① 이성이 비판 능력을 상실했다고 진단하면서 이성의 비판적 활동에서 희망을 찾는 것은 이미 사라진 것을 있다고 가정하는 자기모순이다.
② 개인적인 심리적 병리 현상으로부터 사회적 억압 구조를 설명하는 것은 개별을 보편으로 성급하게 환원시키는 일반화의 오류이다.
③ 자연을 자기 보존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은 자연 중심사상을 가지고 이성을 격하하는 자기기만이다.
④ 인간이 자연을 억압한다는 주장은 자연이 기계처럼 작용한다는 검증되지 않은 명제를 가정한 허구이다.
⑤ 자연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이 자연을 억압한다는 비판은 ‘계몽’이라는 논점에서 일탈하고 있다.
① 이성이 도구화되었다면, 이성이 도구화되었다고 이성 비판을 행하는 호르크하이머의 이성 역시 도구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호르크하이머의 이성 비판이 옳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문제가 될 수 있다. 즉 재귀성의 문제가 있다. 따라서 이것이 답이라고 볼 수 있다.
② 특정한 몇몇 개인이 심리적 병리 현상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모든 사람에게 심리적 병리 현상이 있다고 하면 일반화의 오류가 된다. 하지만 사회의 억압 구조에 대한 설명의 근거를 개인적인 심리적 병리 현상에서 찾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와는 무관하다.
③ 도구적 이성 비판은 이성을 격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비판적 성격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울러 호르크하이머의 주장은 자연 중심 사상과는 무관하다. ④ 제시문에는 자연이 기계처럼 작용한다는 명제가 가정되어 있지 않다. 즉 기계적 자연관을 가정하고 있지 않다.
⑤ ‘계몽’은 이성의 도구화를 말한다. 비판적 성격을 상실하고 신화가 된 이성이 계몽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을 억압한다는 비판은 ‘계몽’이라는 논점에서 일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궤를 같이하고 있다. |
강영원 로스쿨 입시 전문 PLS 논술 담당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