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지역 대부분의 국가가 이 문제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는 만큼 팔레스타인 분쟁은 그리 간단하게 해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팔레스타인 분쟁, 강대국 이권다툼이 씨앗 뿌렸다?
팔레스타인 분쟁은 네 차례에 걸친 중동 전쟁의 원인이 됐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 국가의 영토를 점령하고 팔레스타인 주민을 추방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과도 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중동 지역은 팔레스타인 게릴라의 ‘무장 테러 백화점’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신문에는 팔레스타인인의 자살 폭탄 테러, 이스라엘 군의 민간인 사살 등이 심심찮게 보도된다.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며 몇 십 년간 중동 지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팔레스타인 분쟁, 그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팔레스타인 분쟁의 근본 원인은 종교 분쟁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팔레스타인 분쟁은 ‘예루살렘 성지’를 둘러싼 이스라엘 사람(유대인)과 아랍 사람 간의 갈등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이 문제가 되는 것은 동 예루살렘의 구 시가지에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의 3대 성지가 모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성지로는 예수 무덤 성당과 십자가의 길(비아 돌로로사)이 꼽힌다. 유대교의 대표적인 성지는 통곡의 벽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 군에 의해 폐허가 되고 남은 성전의 외벽이다. 이슬람의 성지는 통곡의 벽 위쪽 언덕에 있는 바위 돔과 알 아크사 사원이다.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메트가 승천했다는 곳으로 이슬람 4대 성지 가운데 하나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유대인은 서기 70년에 로마 제국에 의해 자신들이 살던 예루살렘에서 추방을 당했다. 이 후 그들은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서 2000년의 세월을 버티며 살아 왔다. 19세기가 되면서 유럽에서는 유대인 탄압이 시작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벌어지자, 유대인 민족의 불운은 극에 달한다. 그러나 이들은 유대 민족주의인 ‘시오니즘’을 바탕으로 한층 강하게 단합한다. 결국 유대인은 영국의 ‘벨푸어 선언’에 힘입어 예루살렘에 새로운 이스라엘 국가의 건설을 약속받는다. 벨푸어 선언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내 유대인의 도움이 절실했던 영국이 유대인의 독립 국가 건설을 보장한 것이다.
마침내 1948년 예루살렘에 나라를 세운 이스라엘은 당시 그곳에 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모두 내쫓아 버린다. 한순간 갈 곳이 없어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대부분이 그 땅에서 쫓겨나 난민이 되고 만다. 추방된 이들은 가자 지구라는 곳에서 이스라엘 군인에 의해 통제된 생활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인들은 예루살렘이 자기네 역사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장소이며, 다윗 왕의 전성기를 상징하므로 자신들의 국가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성경에 의거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모조리 내쫓거나 죽여야만 예루살렘의 땅이 깨끗해진다고 생각한다.
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2000년을 살아온 자신들이 그 땅의 주인이며, 생존의 터전이자 이슬람의 성지를 지키려면 투쟁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유대교와 이슬람의 첨예한 대립이 중동 분쟁의 핵심 원인이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양자의 주장이 분쟁의 실질적인 원인을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반면 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 강대국의 이권 다툼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분쟁의 원인을 종교적 이유에서 찾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만 드러난 현상에 주목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중동 분쟁은 1차대전 기간에 유럽 열강이 중동을 지배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진출하려는 과정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영국이 중동 지역에 세력을 넓히기 위해 프랑스와 비밀 협정을 맺고 아랍인과 유대인에게 상호 모순적인 외교적 약속을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즉, 아랍 민족에게는 독립 국가 수립을 약속한 ‘맥마흔 선언’을 했고, 유대 민족에게는 유대 민족의 국가 건설을 약속한 ‘벨푸어 선언’을 한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중동 지역에서 영국이 물러나면서 팔레스타인 문제는 이제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두 강대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시켜 국제적으로 이슈화했고, 유엔은 아랍 측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소련의 동의 아래 팔레스타인을 분할했다. 랄프 분치라는 미국의 외교관은 당시 강대국들이 유대국가인 이스라엘 건설을 지지하고 도와 준 이유는 그저 자국의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비아냥거렸다. 당시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정치, 경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유대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유대인을 도와 이스라엘을 건국하면 자기네 나라에 있는 많은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이주하게 될 것이므로 골칫거리를 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이스라엘 건국을 강행했다는 것이다.
박승렬 LC교육연구소 소장
:심화학습:
위의 내용을 참고로 팔레스타인 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그 해결 방법에 관해 토론해 봅시다.
▼ 화약고 팔레스타인… 왜 문제일까▼
유대-그리스도-이슬람교 성지가 한곳에
3000여년 이상 뺏고 뺏기며 끝없는 갈등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의 동해안 일대를 가리켜 ‘팔레스타인’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옛날에 ‘가나안’이라고 불린 곳이다.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른 것은 BC 12세기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지배를 받게 된 뒤부터다. 현재 이 지역의 80%는 이스라엘 영토다. 팔레스타인 전쟁(1948년) 및 제3차 중동 전쟁(1967년) 결과 요르단·이집트령(領)이었던 요르단강 서쪽 연안 지역과 가자 지구도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됐다.
이 지역에 먼저 살기 시작한 것은 팔레스타인인이었다. 하지만 BC 11세기에 들어서자 히브리인이 이곳에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했다. 성서에 나오는 모세의 이야기가 이 과정을 그린 것이다. 성서에 따르면 모세는 이집트에서 히브리인(지금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나와서 가나안을 점령하는데, 이것이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벌어지고 있는 영토 분쟁의 시발점이 됐다.
이후 히브리인은 솔로몬왕 때 전성기를 맞았으나, 솔로몬이 죽은 뒤 이스라엘과 유대, 두 나라로 분열됐다. 그 후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BC 8세기), 유다 왕국은 신(新)바빌로니아에 의해(BC 6세기) 멸망하게 된다. 이 지역은 BC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통치를 받았으며, BC 1세기에는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 636년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뭉친 아랍인들이 로마를 격파한 이후, 팔레스타인에서는 오스만튀르크령 시대(1516∼1917)를 포함한 이슬람교도의 지배가 계속된다. 12세기에는 잠시 제1차 십자군(十字軍)이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해 이곳을 통치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를 거치면서 팔레스타인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성지(聖地)를 함께 갖게 되어, 복잡한 종교적 ‘숙명(宿命)’을 안게 됐다.
BC 1000년부터 서기 636년까지 팔레스타인은 유대 왕국에 의해 통치됐으며, 거주자의 대부분도 유대인이었다. 그러다가 아랍인들이 이주해 오고, 로마 제국이 팽창해 들어오며, 오스만튀르크에 정복당하는 등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을 거치면서 유대인은 점차 소수민족으로 전락한다. 결국 근대에 이르기까지 팔레스타인은 단 한 번도 독립된 국가였던 적은 없었지만, 1000년이 넘는 기간에 아랍인들의 고향으로 자리 잡았다. 그동안 유대인은 유럽 등 세계 곳곳에 흩어져서 이민 집단을 형성했다. 유대인들은 정치·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입지를 쌓았고, 성공적인 이민 생활을 해서 사실상 불모지나 다름없는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서서히 잊어버렸다.
그러나 19세기 말, 반유대주의가 강해지면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의 집착도 되살아났다. 반유대주의는 유럽에서 시작된 유대인 배척 사상이다. 기독교를 신봉하는 유럽인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을 악마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반유대주의는 이런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대인은 이에 대응해서 유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시오니즘’이라는 민족주의 운동을 벌인다. 학살과 박해를 피해 성경에 언급된 ‘약속의 땅’인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시작한 것이다. 마침 1917년 영국의 벨푸어 선언이 유대 국가 건설에 대한 가능성을 심어주면서, 이전까지 단순히 망상이나 꿈에 지나지 않던 유대 민족 국가가 현실로 다가오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8년 유대인이 이스라엘 국가를 재건하면서 인접 아랍 국가들과의 충돌이 계속됐다. 팔레스타인에 살던 아랍인들은 졸지에 난민으로 전락했다. 이들은 지중해 연안의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이스라엘과 레바논 국경 지대 등지에 흩어져 살게 됐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1964년 야세르 아라파트를 의장으로 하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조직해, 대 이스라엘 투쟁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후 이 지역은 1967년의 제3차 중동 전쟁을 비롯해 1973년의 제4차 중동 전쟁, 1982년의 ‘2일 전쟁’ 등을 겪으면서 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김소현 LC교육연구소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