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영 박사의 신나는 책읽기]산보하듯 천천히

  • 입력 2008년 2월 26일 03시 00분


산보하듯 천천히, 그림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요

그림책은 유아용 도서가 아니라 아기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책이다. 글자를 모르는 아이들이 글자를 아는 어른보다 더 재미있게 읽는 특별한 책이기도 하다. 이미 글자를 알게 된 어린이나 어른들은 글자 속에 ‘갇힌’ 이야기만을 읽게 돼 그림책 읽는 재미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 그림책, 그림 속에 이야기를 숨겨놓고 있는 책

그림책은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모든 아름다움이 다 그렇듯 그림책의 아름다움도 설명하려면 안개처럼 사라지고 만다. ‘보고 저절로 느끼는 책’, ‘보고 느낄 때 독자의 몸과 영혼에 아름다움을 칠해주는 책’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림책을 보고 있으면 행복해진다. 나도 우울한 날이면 그림책을 편다. ‘찔레꽃 울타리’ 같은 책을 보고 있으면 들쥐네 마을을 방문한 듯 마음이 깨끗하고 환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글자가 빼곡한 책을 보고 있을 때는 그림책을 볼 때보다는 덜 행복하다. 아마도 그림이 글자보다 더 자주 말을 걸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그림책에 대한 정의는 다양했다.

‘진주는 그림이고 줄은 텍스트다. 줄 자체는 아름다움의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목걸이는 줄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한다.’

미국의 전설적인 그림책 작가인 바바라 쿠니(1917∼2000)의 말이다. 북 디자이너로 유명한 정병규는 그림책에서 글과 그림의 관계를 ‘화학 반응’이라고 표현했다. 글과 그림이 주종 관계를 넘어 새로운 공간과 의미를 창조한다는 것.

○그림책, 빨리 읽으면 이야기가 달아나는 책

그림책은 스토리를 읽는 책이 아니라 그림 속에서 이야기를 찾아내 이야기로 만들어 보는 책이다. 툭툭 건드리기만 해도 이야기가 우수수 쏟아질 것만 같은 그림들이 풍부하게 실려 있다. 그림 속에서 이야기를 꺼내는 활동, 이것이 그림책을 읽는 바른 방법이다. 그런데 엄마들은 그림책을 너무 빨리 읽어준다.

한 조사에 따르면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그림책을 볼 때 걸리는 시간은 11분, 아이들 혼자서 그림책을 볼 때 걸리는 시간은 평균 9분 정도. 물론 이런 읽기 방법은 그림책을 읽는 바른 방법이 아니다. 어느 무덥던 여름 날 한 서점의 어린이 책 코너에서 만난 젊은 엄마가 예닐곱 살 된 딸에게 그림책 7, 8권을 30여 분 동안에 모두 읽어주는 것을 봤다. 아이는 ‘응, 응’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어머니는 열심히 읽어주고 있었다. 아마도 어머니는 나중에 친구들에게 말할 것이다.

“서점에 가서 그림책 일곱 권을 읽었어.”

그러나 그날 읽은 책들은 아이에게 별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냥 버스타고 지나가면서 흘깃흘깃 본 풍경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림책, 독자에게 창작의 기쁨을 안겨주는 책

그림책을 볼 때는 정말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림책은 문자가 아니라 그림을 통해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림 속에 숨겨놓은 이야기를 찾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엄마들이 5, 6분에 읽어주고 넘어간다면 아이의 손을 잡고 100m를 어른의 속도로 달리는 것과 같다. 어른에게 손목을 잡힌 채 질질 끌려가는 아이를 상상해 보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유아들도 그림책을 보면 중얼거린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단선적으로 단어만 나열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를 넣어 간단하지만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진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보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독자가 그림책에서 읽어낸 이야기는 작가가 애초에 만들어낸 그대로가 아니라는 점이다. 문자 위주의 문학 책에서는 80% 정도가 작가의 이야기에 의지하지만 그림책에서는 독자의 자유가 더 많이 보장된다.

아이들은 그림책을 읽으면서 거꾸로 20% 정도만 작가의 이야기에 의지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로 채운다. 그래서 그림책을 읽을 때는 누구나 작가가 된 기쁨을 맛보게 된다. 이것이 그림책을 볼 때 독자가 느끼는 창작의 기쁨이며 즐거움이다.

○ 그림책, 말하기와 글쓰기 능력을 길러주는 책

그림책을 활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 스스로 읽게 하는 것이다.

글자를 모르는 아이는 모르는 대로 무슨 이야기가 써있는지 이야기하게 한다. 이렇게 하면 그림책 한 권으로도 1, 2시간이 금세 지나간다. 아이들은 묻는 말을 받아주면 그림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찾아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아이들의 두뇌 속에서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와 작가가 만든 이야기를 비교하고, 더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고, 종합하는 활동이 일어난다. 이런 두뇌 활동은 아이들에게 기쁨을 준다. 아이들은 이 과정을 통해 만든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전화로 전하고, 삼촌과 고모에게 말하면서 그림책의 재미를 톡톡히 아는 독자가 된다.

정말 그림책은 빨리 읽는 책도 아니지만 한 번 읽고 버리는 책은 더욱 아니다. 어린 시절 본 책을 어른이 되고 다시 노인이 돼서 본다면 얼마나 재미있고 감개무량할까?

● 이런 그림책 활용하세요

· 찔레꽃 울타리

· 오른발 왼발

·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 도깨비를 빨아버린 우리 엄마

· 심심해서 그랬어

·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

·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 솔이의 추석이야기

· 노란 스웨터

· 미스 럼피우스

남미영 한국독서교육개발원장· mynam@kred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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