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보다 더 기자다웠던… 化汀 김병관 선생의 큰 삶

  • 입력 2008년 2월 26일 03시 02분


김병관 전 동아일보 회장(가운데)은 청소년이 신문의 역사와 미래를 알도록 하는 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2000년 12월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3, 4층에 국내 첫 언론전문박물관인 ‘신문박물관(프레시움)’을 만들어 개관했다. 왼쪽부터 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 고건 서울시장, 권오기 신문박물관장, 김 회장, 이한동 국무총리, 채문식 전 국회의장, 기세훈 인촌기념회 이사장(직책은 당시).
김병관 전 동아일보 회장(가운데)은 청소년이 신문의 역사와 미래를 알도록 하는 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2000년 12월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3, 4층에 국내 첫 언론전문박물관인 ‘신문박물관(프레시움)’을 만들어 개관했다. 왼쪽부터 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 고건 서울시장, 권오기 신문박물관장, 김 회장, 이한동 국무총리, 채문식 전 국회의장, 기세훈 인촌기념회 이사장(직책은 당시).
화정 김병관(化汀 金炳琯) 선생은 취재 현장을 누비며 기사를 쓰지는 않았지만 기자보다 더 기자 같던 영원한 신문인(新聞人)이요, 자유 언론의 보루였다. 또 교육과 전통문화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남북 교류에도 직접 뛰어들던 실천가였다.

그는 어린 기자들과도 격의 없이 어울렸다. 좋은 기사, 좋은 칼럼을 읽으면 때로는 전화로, 때로는 취재 현장까지 기자를 찾아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기자들이 시시비비(是是非非)의 자세를 흐트러뜨리면 따끔하게 나무라던 엄한 선배였지만 속정은 깊었다. 그는 언론의 자세에 대해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하면 된다”고 했다.

화정은 2001년 7월 동아일보 명예회장과 이사직을 내놓고 신문인 33년을 마감하던 날 동아일보 임직원들에게 말했다. “이 나라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명운이 바로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명감으로 단합해 주십시오. 개혁과 합법이라는 미명 아래 제헌 정신을 훼손하고 있는 일각의 세력에 대해 엄정한 비판으로 자유 민주주의를 지켜야 합니다. 용기와 인내를 갖고 언론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 자유 언론에 대한 신념과 시시비비의 잣대가 이 말 속에 녹아 있다.

그가 동아일보 발행인이 된 1987년 경찰이 서울대생 박종철 군을 고문치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엄혹했던 그해, 1월 19일자 동아일보는 ‘물고문 도중 질식사’ 제하에 1면 전면을 이 사건 관련 기사로 채웠다. 그뿐 아니라 당시 발행면수 12면 중 6개면에 걸쳐 국가 공권력의 만행을 고발했다. 동아일보가 연일 터뜨린 고문치사 사건 속보는 그해 6월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그때도 화정은 동아일보 기자들의 버팀목이었다. 그는 1986년 국가안전기획부에 끌려가 신변 위협까지 받았지만, 신문의 정론직필(正論直筆)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회피하지 않았다.

화정은 2000년 한반도 문제의 실사구시적 해법을 찾기 위해 화정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를 사재로 설립했다. 이에 앞서 1998년 10월 동아일보 회장이던 화정은 ‘남북을 잇는 가교’를 자임하면서 동아일보 대표단을 이끌고 8일간 북한을 방문했다. 그는 금강산을 관광특구로 지정해 이산가족 만남의 장으로 활용할 것을 북에 제안했다. 그러면서도 북측 당국자들에게 “잘못된 점이 있을 때는 남이든 북이든 과감하게 비판하겠다”고 언명했다.

화정은 남에서나 북에서나 이처럼 당당했다. 민족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통일을 지지한다는 견해를 일찍이 밝히면서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하거나 국가안보를 흔드는 일, 통일을 정략의 재료로 이용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이는 동아일보의 제작 및 논평 원칙과 일치했다.

이에 따라 동아일보는 6·15남북정상회담 이후 김대중 정권의 일방적 대북 유화책에 대해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자 정권 측은 ‘언론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신문사와 그 대주주에 대해 악의적으로 들춰내고 과장해 부도덕 집단인 양 몰아갔다. 그러면서 “굴복하라”고 협박했다. 하지만 화정은 “동아일보는 앞으로도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언론 본연의 역할을 다할 것으로 믿는다”면서 시련을 견뎌냈다.

화정은 국민 통합이 국가 발전의 필수 과제임을 확신했다.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감옥에 있을 때 공개적으로 면회를 했다. 이는 1980년 언론 통폐합으로 자유 언론의 목을 조르고, 동아방송을 강탈해 간 당사자에게 먼저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아무나 흉내 내기 어려운 용기였다.

화정은 1999년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21세기형 인재 양성을 위해서는 ‘민족 고려대’에서 ‘세계 고려대’로 가야 한다며 이를 위한 인프라를 깔았다. 2005년 고려대 개교 100주년을 맞아 안암캠퍼스 중앙광장을 조성하고 100주년기념관과 화정체육관을 건립한 것은 그 일부다. 인문학의 발전을 위해 올해 개교 100주년을 맞는 중앙중고교에 인문학박물관을 짓기로 한 사람도 화정이었다.

그의 국악 사랑은 각별했다. 화정이 평소 즐겨 부른 ‘흥타령’에 대해 안숙선 명창은 “전문가가 들을 때 잘 부르는 편은 아니지만 속멋이 배어 있다”고 평했다. 화정은 완창 판소리 발표회, 창극 아리랑의 해외 공연 등을 지원했다. 그는 녹두장군인 전봉준, 홍범도 장군, 윤봉길 의사가 창극으로 부활하는 데도 산파역을 했다.

지난해 성대 수술을 받고 육성을 잃은 채 투병하면서도 동아일보 논설위원들에게 불고기를 사 주던 화정이 떠오른다. 큰 메모지에 그는 이렇게 썼다. “뜨거운 국물은 식혀 먹어. 그리고 독한 술은 물에 타 마시고….”

이제 화정은 우리 곁을 떠났다. 그 앞에 묽은 술 한 잔도 올릴 수 없게 됐다. 그러나 그가 민주 언론, 독립 언론의 수호자로 한국 언론계에 남긴 발자취는 쉬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화정 김병관 회장님, 고이 잠드소서. 그리고 대한민국의 자유 언론을 지켜 주소서.

배인준 논설주간

▼화정 김병관 선생 약력▼

△1934년 서울 출생

△1954년 서울 중앙고 졸업

△1958년 고려대 경제학과 졸업

△1968년 동아일보 입사, 총무, 광고, 판매국 근무

△1981년 동아일보 상무

△1983년 동아일보 전무

△1985년 동아일보 대표이사 부사장

△1987년 동아일보 발행인

△1989년 동아일보 대표이사 사장

△1990년 한국신문협회 회장

△199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

△1993년 동아일보 대표이사 회장

△1997년 호주 모나쉬대 명예법학박사

△1999년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제11대 이사장

△2001년 동아일보 명예회장, 일본 와세다대 명예법학박사


▲ 영상취재 : 동아닷컴


▲ 영상취재 : 동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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