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영화, 생각의 보물창고]더 샤이닝

  • 입력 2008년 3월 10일 02시 59분


《우리 인간은 과연 어떤 순간에 가장 심한 공포를 느낄까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대표작 ‘샤이닝(The Shining)’은 이런

질문에 답하는 영화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28년 전인 1980년에 만들어진 이 공포영화는

사지가 뚝뚝 잘려나가는 요즘 슬래셔 무비(slasher movie·난도질 영화)에 비하면 ‘참혹한’ 축에도 못 끼는 영화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샤이닝’은 보는 이의 마음을 점점 옥죄면서 결국엔 미쳐버릴 것만 같은 강박 속으로 몰아넣는 심리공포의 진수를 보여주지요. 고립된 호텔에서 벌어지는 살육을 다룬 이 영화는 낮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극심한 공포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 도사리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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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공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어쩌면 내 가족이 바로…

[1] 스토리라인

전직 교사인 ‘잭 토렌스’(잭 니컬슨)는 이제 소설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미국 콜로라도 두메산골에 자리 잡은 ‘오버룩’ 호텔을 겨울 동안 관리하는 일을 제안받습니다. 겨울이면 폭설이 내려 외부세상과 완전히 단절되는 오버룩 호텔. 그곳은 폭설로 고립되는 6개월간 일절 손님을 받지 않으면서 오직 관리인 가족만이 지키도록 해왔지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소설에 전념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관리직을 수락한 잭은 아내 ‘웬디’, 아들 ‘대니’와 함께 호텔에서의 호젓한 삶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잭에게는 한 가지 꺼림칙한 일이 있습니다. 몇 해 전 겨울, 자신처럼 호텔을 관리하던 남자가 자기 아내와 쌍둥이 딸들을 무참히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지요.

아니나 다를까, 폭설이 내리고 호텔은 외부세계로부터 고립됩니다. 으리으리한 최고급 호텔의 유일한 손님이 되어 행복을 만끽하는 잭의 가족. 하지만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옵니다. 살해당했다던 쌍둥이 소녀들이 잭과 아들 대니의 눈앞에 자꾸만 나타나는 겁니다. 대니는 자기 입속에만 산다는 상상 속 친구 ‘토니’를 불러내 이상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아, 결국 올 게 오고야 말았군요. 이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미쳐버린 잭이 갑자기 도끼를 들고 아내와 아들을 향해 달려듭니다.

[2] 핵심 콕콕 찌르기

인간이 느끼는 가장 끔찍한 공포는 어디서 비롯될까요? 입가에 피를 철철 흘리는 귀신일까요? 전기톱을 들고 달려오는 연쇄살인범일까요? 외계에서 온 에일리언 같은 잔인무도한 괴물일까요? 아니면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같은 치명적인 질병일까요?

아닙니다. 이 영화는 대답합니다. ‘공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고. 가장 가까운 곳, 바로 우리의 가족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 가족. 이 가족을 대표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든든한 존재인 가장(家長)이 불현듯 도끼를 들고 아내와 아들에게 달려들다니.

아들 대니가 ‘토니’라고 하는 상상 속 친구를 갖게 된 사연도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폭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대니는 만취해 들어온 아버지가 자신의 팔을 당기는 바람에 어깨가 탈골되는 끔찍한 사건을 겪은 후로 토니라는 가상의 친구를 만들어내 그와 이상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죠. 다시 말해 토니란 존재는 가족 내에 흐르기 시작하는 살인의 광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아들 스스로가 필사적으로 만들어낸 심리적 탈출구였던 셈입니다.

[3] 이건 몰랐지?

살인마로 돌변하는 아버지. 이 속엔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을까요?

‘샤이닝’이 나오던 1980년의 미국으로 돌아가 봅시다. 당시 미국의 상황은 이 영화 속 내용과 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요.

1975년 베트남전쟁이 끝났고 미국은 패전했습니다. 미국의 가치관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경제호황도 꺾이면서 대량 실업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마약 중독은 사회에 퍼져나갔습니다. 신과 도덕을 믿고 가족의 가치를 믿는 청교도적인 가치관이 무너지고 이혼율이 급증하면서 가족해체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격동의 시기였지요.

영화는 당시 미국의 이런 사회상을 담고 있습니다. 미쳐가는 가장 잭의 모습은 미국이라고 하는 조국에 대한 일종의 은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족이 믿고 따르던 가장이 돌연 살인마로 변해 가족을 죽이려 한다는 영화 속 설정은 미국인들이 그토록 믿고 따르던 미국의 가치관이 비틀거리고 무너져 내리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아들 대니가 자신을 죽이려 다가오는 아버지를 피해 호텔 밖 미로(迷路) 속으로 도망하는 장면은 영화의 메시지가 함축적으로 담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무지 통로를 알 수 없는 ‘감옥 아닌 감옥’ 미로. 이 미로는 혼돈과 몰락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드는 미국의 가치관과 가족제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었으니까요.

[4] 명장면 명대사

‘샤이닝’은 영화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스테디캠(steadicam)이란 촬영기법이 효과적으로 사용된 영화이니까요.

스테디캠이란 충격흡수 장치를 단 카메라를 들고 등장인물의 움직임을 계속 따라가면서 마치 미로 속을 헤매듯 연속적으로 촬영하는 기법이지요. 이 영화에서는 아들 대니가 세발자전거를 타고 호텔 내 곳곳을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장면이 스테디캠이 쓰인 대표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고립무원의 호텔에 갇힌 가족이 느끼는 미칠 듯한 폐쇄공포증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는 명장면입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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