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보다 중시하는 명예
한편으론 잔혹한 전쟁-학살
‘국화와 칼’ 일본의 두모습
편견없이 알아볼까요
제2차 세계대전, 미국에 일본은 ‘이해 못할 적’이었다. 일본군은 잔인하고 질겼다. 일본군 전사자만 1만 7000명이 나온 버마 전투. 포로는 140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포로수용소에 들어온 일본 군인들은 더없이 공손하고 협조적이었다. 어디 그뿐이던가. 결사항전을 외치던 일본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점령군으로 들어온 맥아더에게 절대복종했다. 마치 미군이 원래부터 자신들을 지배했던 것처럼 말이다.
일본인의 태도는 미국 정부를 혼란에 빠뜨렸다. 미 국무성은 ‘이해 못할 적’ 일본을 알아내리라 결심한다. 그래서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에게 일본에 대한 연구를 부탁했다. 그 결과 탄생한 책이 ‘국화와 칼’이다.
베네딕트는 몇 가지 키워드로 일본인의 특성을 조목조목 풀어준다. 이 특성 중 ‘각자가 알맞은 위치에 놓인다(take one's proper station)’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일본에서는 삼촌과 조카가 서로 말 놓고 지낼 수 없다. 세상이 질서 잡히려면, 사람들이 자신의 분수를 알고 그에 걸맞게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미국인에게는 이상할 수밖에 없다. 그네들은 자유와 평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이다. 누군가가 상대의 자유를 빼앗았다면. 이는 당연히 싸울 이유가 된다. 반면, 일본인의 생각은 다르다. 형은 형답고 동생은 동생다워야 가정이 제대로 서지 않겠는가. 누군가 주제넘게 나댄다면 버릇을 고쳐 자기 자리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웠다. 선진국인 일본이 형이 되어 아시아 여러 동생 나라가 사이좋게 지내도록 규율을 잡겠다는 논리다. 평등한 관계가 올바르다고 여기는 미국적 가치와 당연히 부딪힐 수밖에 없겠다.
미국과 일본은 보답을 주고받는 문화도 아주 다르다. ‘은혜를 입었다’는 표현은 일본인의 특성을 압축해 보여 준다. 서양인들에게 누군가의 도움은 고마움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일본인에게 ‘은혜’는 꼭 갚아야 할 무엇이다. 베네딕트는 이를 돈을 빌리고 갚을 때 생기는 부담감에 견준다. 누군가에게 신세를 지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 특히 나보다 형편이 못한 이들에게 도움 받았을 때는 더하다. 누군가에게 빚진 은혜나 신세는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서 갚아야 할 무엇이다. ‘의리를 모르는 놈’이라는 비난이 얼마나 가슴을 저미는지 떠올려 보라. 신세를 진 사람의 부탁이 도덕적이지 않아도 거절하기 힘든 이유다.
또한 일본인은 명예를 중요하게 여긴다. 전쟁 당시, 일본 대본영(大本營)에서는 ‘세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거듭 강조하곤 했다. 일본 문화는 ‘체면 문화’다. 명예를 잃는 일은 죽음보다 더 두렵다.
이제 두 얼굴의 일본 문화가 어느 정도 이해되기 시작한다. 일본인은 겸손하고 예의바르다. 이런 그들이 전쟁 때는 왜 그리도 잔인했을까? 아시아의 맏형으로서 처신해야 한다는 조바심, 그러다가 망신이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 패해서 부모나 국가의 은혜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등이 섞여서이겠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일본이 충분히 평화적인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전쟁이 아니라 평화와 질서로 세계인들에게 ‘인정’ 받을 수 있다면, 이들은 기꺼이 그런 방식을 택할 것이다. ‘국화’라는 문화와 ‘칼’이라는 무력은 명예를 지키는 수단일 뿐이다.
우리는 흔히 편견에 휘둘려 상대를 자주 깎아내리곤 한다. ‘일본인은 약삭빠르다’ 같은 생각이 대표적인 예다. 문화인류학은 편견을 벗어 놓고 자료와 관찰을 통해 사람들의 특성을 ‘객관적’으로 드러낸다. 오해와 갈등이 많은 세상, 균형 잡힌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문화인류학적인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