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영화, 생각의 보물창고]시체들의 새벽

멍청하고 획일화된 좀비,그건 바로 우리 현대인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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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들의 새벽(Dawn of the Dead).’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습니다. ‘현대 공포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 조지 로메로 감독의 1978년 작이지요. 로메로가 그 10년 전 내놓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의 속편인 이 영화는 좀비(zombie)를 공포영화의 중심으로 끌어온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좀비. 서인도제도 아이티 섬의 부두교 의식에서 유래된 괴이한 존재로, ‘살아있는 시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걷는 좀비는 살아있는 사람의 육체를 뜯어먹는 저주스러운 존재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런 생각 혹시 해보았나요? 좀비에겐 그저 ‘끔찍한 식인 괴물’을 지나 뭔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함의가 숨겨져 있진 않을까 하는…》

[1] 스토리라인

수많은 사람이 좀비로 변해 거리를 헤맵니다. 좀비를 근절하기 위한 토벌대가 구성됩니다. 토벌대 속엔 ‘피터’와 ‘로저’란 인물이 있었지요. 몰려드는 좀비를 피해 이들은 방송국 기자인 ‘스티븐’, 그의 여자친구 ‘프랜신’과 더불어 헬리콥터에 몸을 싣습니다.

네 사람이 헬리콥터에서 내린 곳은 도시 외곽의 한 대형 쇼핑센터 옥상. 인적이 사라진 쇼핑센터 꼭대기 층에 피신처를 마련한 이들은 이내 이상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좀비들이 설명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자꾸만 쇼핑센터를 향해 몰려오는 것입니다.

피터 일행은 쇼핑센터 안에 즐비한 의류 음식물 가전제품 등을 닥치는 대로 소비하면서 망중한(忙中閑·바쁜 가운데 얻은 틈)을 즐깁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로저와 스티븐이 그만 좀비에게 물어뜯기는 바람에 그들 역시 좀비로 변하고 만 것이지요. 피터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들을 처치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단 둘이 남겨지게 된 피터와 프랜신은 연료가 얼마 남지 않은 헬리콥터를 몰고 다시 정처 없는 도피를 시작합니다.

[2] 핵심 콕콕 찌르기

좀비란 존재 속에 숨겨진 의미를 모색하기 위해선 좀비가 가진 특징을 논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좀비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보입니다.

①자기 고유의 사고력과 판단력을 잃은 채 최면에 걸린 듯 느릿느릿 걷는다. ②개성을 상실한 채 획일화된 집단행동을 한다. ③정상인을 물면 그 사람도 좀비가 되는 전염성이 있다. ④머리(뇌)를 날려버려야만 비로소 완전히 제거된다.

생각해 보세요. 이 영화가 단순히 관객을 무섭게 만드는 걸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영화라면, 좀비를 영화 속 모습보다 더 잔혹하고 더 빠르고 더 똑똑하고 더 강력한 존재로 설정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우린 빨리 눈치를 채야 합니다. 이 영화가 좀비를 느리고 멍청하며 다소 무능력한 존재(좀비들은 에스컬레이터조차 제대로 타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들을 놀리고 달아나는 사람들을 따라잡을 생각조차 못합니다)로 묘사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좀비 속엔 알고 보면 정치적 사회적인 함의가 숨어있습니다. ‘자신만의 사고력과 판단력을 상실한 채 개성을 잃고 획일적으로 행동하는 무기력한 현대인’에 대한 비유가 바로 좀비란 사실이지요.

[3] 더 깊이 생각하기

그런데 이상합니다. 좀비들이 하나 같이 대형 쇼핑센터로 몰려드는 이유는 뭘까요? 좀비들을 쇼핑센터로 이끄는 알 수 없는 자력의 정체는 뭘까요? 해답은 프랜신이 스티븐과 나누는 다음 대화 속에 숨어있습니다.

“뭐하는 거죠? 왜 좀비들이 쇼핑센터로 몰려드는 거죠?”(프랜신)

“저것들의 본능(instinct)이나 기억(memory) 때문이지. 이곳(쇼핑센터)은 저들(좀비들)이 예전에 자주 오던 곳이야. 저들이 살아있을 때 이곳은 저들에게 아주 중요한 장소였지.”(스티븐)

좀비들이 쇼핑센터에 몰려드는 이유는 본능과 기억 때문이라는 겁니다. 쇼핑센터란 뭔가요?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우리 현대인의 물질적 욕망이 집약된 장소입니다. 소비와 욕망의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수많은 브랜드와 물건, 돈과 인간의 욕망으로 차고 넘치는 곳이지요.

그렇습니다. 주체적인 사고능력을 상실한 채 그저 멍한 표정으로 쇼핑센터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는 좀비들, 이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욕망에 세뇌돼 소비의 노예로 전락해 버린 무기력한 현대인에 대한 무시무시한 은유입니다.

[4] 이건 몰랐지?

좀비는 무섭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엔 좀비보다 100배는 더 무서운 존재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멀쩡히’ 살아있는 인간들이지요.

알고 보면 영화 속 인간은 좀비보다 훨씬 잔혹합니다. 인간들은 무슨 게임이나 장난을 즐기듯 총으로 좀비들의 머리통을 날리면서 환호성을 지릅니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좀비를 제거하는 게 아니라 그저 유희의 일종인 듯 좀비를 ‘사냥’합니다. 거대한 트럭으로 좀비를 깔아뭉개면서 깔깔거립니다.

영화엔 이렇듯 가치의 전복(顚覆)이 있습니다. 진정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건 좀비가 아니라 우리 인간이니까요. 좀비는 인간의 악마적 본성을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였던 겁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