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 초등학생 피살사건을 담당했던 경기 안양경찰서의 경찰이 부실수사를 조목조목 지적하며 자책하는 e메일을 24일 언론에 보냈다.
수사본부 소속이라는 A 씨는 “피의자 정모(39) 씨가 실종사건 이후 5일 정도 집을 비우고 주변에서도 성추행 제보가 있었지만, 실종 당일 대리운전을 했다는 정 씨의 말만 믿고 대리운전 회사에는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A 씨는 “2개월 뒤 군포경찰서 직원이 군포, 수원 부녀자 실종사건의 용의자 정 씨가 안양8동에 살고 있다고 알려와 압수수색영장까지 발부받아서 집 안을 수색하고 혈흔반응 검사까지 했지만 아무것도 안 나오자 또다시 수사에서 배제했다”고 덧붙였다.
2004년 군포에서 실종된 40대 여성의 가족이 정 씨에 대해 제보해서 3차 조사를 했지만 역시 실패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정 씨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된 결정적 단서인 렌터카 관련 수사도 2월 초에 착수했지만 렌터카 대여 목록만 뽑아놓고 확인도 하지 않았다”며 “창피한 얘기지만 렌터카 명단에서 우연히 정 씨 이름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정 씨의 당일 행적 확인도 안 했다”고 고백했다.
경찰 수뇌부가 다그치는 바람에 오히려 수사에 차질이 빚어질 뻔한 사실도 말했다.
그는 “형사들은 ‘지금부터라도 빠져나오지 못할 증거를 찾자’며 추가 증거 확보에 나섰지만 경기지방경찰청 지휘부에서 ‘무조건 잡아오라. 다 자백한다’며 다그쳐 긴급체포를 했다”면서 “증거도 없이 체포해 자백이 늦어졌고 하마터면 구속영장도 받아내지 못할 뻔했다”고 말했다.
이런 과정에 대해 담당 검사가 “이런 드라마 같은 수사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데 할말이 없었다고도 했다.
수사 과정에서 폐쇄회로(CC)TV에 찍힌 여자아이를 오인해 1개월을 허송세월한 점, 특정대학 출신 경기지방경찰청 간부들이 일선 형사들에게 막말을 퍼부으며 수사를 진행한 점, 수사지휘부와 일선 형사의 갈등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경기지방경찰청은 이에 대해 “처음부터 정 씨에 대한 수사를 했지만 당시엔 혈흔반응이나 물증이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다.
어청수 경찰청장도 초동수사에 문제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는 이날 기자 간담회에서 “물증이 없으면 인신을 구속하기 어렵지만 좀 더 세밀하게 조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다. 수사 중인 사건은 물론이고 무혐의로 종결된 사건도 다른 지방경찰청에서 검색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어 청장은 또 “애초에 군포 부녀자 실종사건 조사에서 정 씨의 혐의를 밝혀냈다면 혜진이와 예슬이가 희생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 점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안양=남경현 기자 bibulus@donga.com
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