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동포가 3D에만 종사한다는 것은 옛말입니다."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중국 진출 대기업에 법률자문을 하고 있는 지용천(36·사진) 변호사는 중국 지린(吉林)성에서 태어난 중국 동포다. 그는 베이징사범대 역사학과와 중국정법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대학졸업 후 1999년 고려대 법대에서 국제법 석사학위를 받은 뒤 호주 시드니법대로 유학을 가서 호주 변호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그는 현재 한국 기업들의 중국 기업에 대한 인수합병(M&A)과 부동산 관리, 노무관련 법무를 맡고 있다.
최근 지 변호사처럼 국내의 고급 전문직에 진출하는 중국 동포가 늘면서 '중국 동포=일용직 노동자'라는 편견이 깨지고 있다. 이들은 중국어와 한국어에 모두 능한데다 양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 깊어 한중 경제, 문화교류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중국 동포에 대한 시각을 바꿔 이들을 비즈니스 네트워크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변호사를 비롯해 애널리스트, 대학 교수, 예술가 등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국 동포들을 만나봤다.
●로펌 중국 동포 채용 늘려…교수·연구직 입국자는 60% 급증
지 변호사가 몸담고 있는 법무법인 태평양은 최근 중국 진출기업들의 법무상담이 폭주하면서 중국 변호사 8명을 채용했다. 이 가운데 한족(漢族) 한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7명은 모두 중국에서 태어나 현지 명문대를 졸업한 동포들이다.
이 회사는 계속 증가하고 있는 한중 교역규모를 감안해 이달 안으로 중국 동포 변호사를 추가로 늘릴 예정이다.
이처럼 중국 동포 출신 변호사가 환영받는 것은 법률시장의 폐쇄적인 속성상 국내파 변호사들이 현지에서 활동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 한국 기업고객을 상대할 때도 한족보다는 모국어에 능숙한 동포 변호사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지 변호사는 "동포들은 중국에서도 우수한 인재로 꼽히고 있다"며 "정부와 국민들이 중국 동포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에서 벗어나 이들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법조계뿐만 아니라 학계도 중국 동포들의 진출이 잇따르고 있다.
25일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에 따르면 교수, 연구직, 강사직 취업비자로 입국한 중국 동포 수는 2003년 246명에서 지난해 397명으로 61%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지난해 말 기준으로 국내에서 석사 학위를 밟고 있는 중국 동포는 33명, 박사과정은 30명, 상사주재원은 83명인 것으로 조사됐다.
중국 지린성에서 태어난 김 연구위원은 1993년 지린대 경제관리학과를 거쳐 1996년 연세대 국제경영학 석·박사를 딴 뒤 옌벤대 경영학과 부교수를 지냈다. 그는 현재 연구소에서 한국 기업의 중국시장 진출 전략을 연구하고 있다.
김 연구위원은 "중국 진출 국내기업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현지화에 집중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중국 동포들을 현지채용인으로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지채용인에 대폭 권한을 위임하는 미국이나 홍콩기업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 연구위원은 "설사 중국 동포들이 나중에 중국 기업에 스카웃되더라도 이들은 장차 한국 경제의 든든한 현지 네트워크가 될 수 있다"며 "동포들 가운데 고급인력에 대해서는 국가가 나서서 이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증권가와 예술계에도 진출
증권업협회에 따르면 현재까지 다섯 명의 중국 동포들이 대우, 한화, 키움증권에서 증권맨의 꽃으로 불리는 애널리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이 중 지난해 11월 대우증권에 입사해 중국 거시경제를 전망하고 있는 정향빈(27·여) 애널리스트는 하얼빈(哈爾濱)시 출신.
그는 하얼빈공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지도교수 추천으로 2004년 서울대에서 국제경영학 석사를 마쳤다. 한국행을 추천한 지도교수는 유학문제로 고민하던 정 씨에게 '한국기업의 중국 내 위상이 높으니 한국에서 경영학 공부를 하면 앞으로 기회가 많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정 씨는 "삼성전자, SK, LG 등 대기업들이 글로벌 인력채용을 확대하면서 하얼빈대를 졸업한 동포 친구들이 함께 한국에 왔다"고 말했다.
중국 베이징올림픽 공연에 초청돼 한류를 일으키고 있는 동포 예술인도 있다.
지린성 옌볜(延邊)자치주에서 태어난 정영주(31·여) 동서울대 방송연예과 교수가 그 주인공. 그는 국수호 무용단과 함께 '한국의 밤' 행사 때 '블랙드럼'이라는 퍼포먼스를 선보일 예정이다.
블랙드럼은 한국 전통 리듬에 중국의 북과 서양의 춤을 결합한 '난타'식 퍼포먼스. 중국과 한국의 전통예술에 밝은 정 교수가 중국 시장진출을 위해 만든 야심작이다.
정 교수는 "중국의 경제성장이 가속화되면서 대중들의 문화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며 "한국의 우수한 문화컨텐츠를 중국인의 입맛에 맞춰 변화시켜 중국 시장에 진출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편견에서 벗어나 고급인력 적극 관리해야
중국 전문가들은 이 같은 고급 동포인력을 국가차원에서 적극 활용하려면 우선 그들에 대한 편견부터 없애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근 연변과학기술대는 한국 취업을 희망하는 동포 학생들이 늘면서 이들을 위해 한국 문화와 제도를 가르치는 인력개발원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학생들은 같은 조건이면 한국보다 일본기업을 선호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대해 이승률 연변과기대 부총장은 "중국 동포를 머슴부리 듯 하는 한국 기업과는 달리 일본 기업은 5~10년 정도 일하면 이들을 중국법인의 팀장이나 사업본부장 등 핵심보직에 임명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상은 한남대 중국통상학과 교수도 "대기업에서 중국 동포들을 한족에 비해 차별해 온 것이 사실"이라며 "일례로 홍콩이나 외국 유명 대학에서 MBA를 딴 한족은 부장급 이상으로 채용하지만, 비슷한 조건의 동포 출신은 현지 주재원 밑에서 비서로 부리는 일도 있다"고 말했다.
이 부총장은 "요즘 상당수 중국 동포 학생들은 중국어와 한국어는 물론이고 영어와 일어까지 익힐 정도로 고급두뇌"라며 "한국 정부와 기업들이 중국 현지에서부터 이들에 대한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투자에 앞서 동포 인력에 대한 데이터베이스(DB)를 먼저 구축해야한다는 지적도 있다.
정 교수는 "베이징대, 칭화대 등 중국 명문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포 청년들이 상당히 많은데도 이들의 명단과 전공, 특기 등이 수록된 DB는 전무하다"며 "DB를 구축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들에게 장학금과 유학의 혜택을 제공해 국내 대기업 등으로 데려올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