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영혼… 양심 등 物자체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
과학-종교의 공존 지혜
칸트에게 배울수 없을까요
때는 18세기, 자연과학은 무서운 속도로 떠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 말씀’에 무작정 매달리지 않았다. 기독교 성경을 대신해 과학이 사람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유럽은 기독교에 뿌리를 둔 사회다. 당연히 무너지는 신앙에 대해 걱정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렇다고 과학이 완전히 믿음직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과학 법칙은 너무도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과학 법칙대로 세상이 돌아가리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 법칙은 과거를 설명해줄 뿐, 미래에 대해 100% 온전한 확신을 주지는 못한다. 세상은 우연과 예외로 가득하다.
신앙이 흔들리고 과학은 확신을 주지 못하던 시대,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으로 모든 두려움을 잠재웠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유명한 세 가지 물음을 던진다. 첫째,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둘째,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셋째,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신도 답을 못 주는 시대에는 인간 스스로 이 세 가지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했다. ‘순수이성비판’은 이 첫 번째 질문인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책이다.
칸트는 여기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회전)’를 시도한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 칸트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우리에게 모든 단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을 우리 식대로 해석할 뿐이다. 우리는 세상이 진짜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다. 그저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을 통해서만 세상을 알기 때문이다. 정신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에 맞춰 들어오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규칙을 덧씌워 알아낸다.
현대 신경생리학 연구를 보면 칸트의 생각이 더 잘 이해된다. 굴러가는 축구공을 본다고 하자. 우리 뇌에는 공의 둥근 모양을 파악하는 부분, 공의 색깔을 알아내는 부위, 이동하는 과정을 짚어내는 부분이 각각 따로 있단다. 서로 다르게 알아낸 정보들을 한데 합쳐서 두뇌는 ‘공이 굴러가고 있구나’라는 판단을 내린다.
칸트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정신에는 12가지 범주(Category)가 있다. 분량 성질 관계 양상 등이다. 이것으로 감각을 통해 들어온 데이터(data)를 나름의 틀에 따라 정리하고 알아낸다. 그렇다면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나 확실하게 다가온다. 세상이 어찌되었건, 적어도 우리의 정신은 나름의 확실한 규칙에 따라 정보를 정리하여 보여줄 테니까.
칸트는 세상의 진짜 모습을 ‘물자체(Ding an sich)’라고 불렀다. 우리는 물자체를 알 수 없다. 인간은 오직 감각을 통해 주어진 정보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니까.
‘순수이성비판’은 이제 신앙과 과학 사이를 교통정리 한다. 신과 영혼, 양심 등은 물자체에 속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이 있음을 느끼곤 한다. 우리의 정신이 다다르는 곳은 여기까지다. 따라서 이런 문제는 교회와 신앙의 몫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
칸트의 묘비에는 ‘순수이성비판’의 마지막 구절이 적혀 있다. ‘나의 마음을 채우고, 생각할수록 놀라움과 존경심을 더하는 두 가지가 있다. 머리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 그리고 내 마음속의 도덕법칙.’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