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범때 186개大→현재 40여大로 쇠락
1996년 연세대 사태후 거센 여론 비판
“불법단체에 엄격해진 법집행도 한몫”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이 창립 16년 만에 의장 선출에 실패함으로써 국내 최대의 학생운동조직인 한총련이 조직 존속의 중대 기로에 섰다.
○ 초유의 ‘의장 공석’ 사태 원인은
당초 한총련이 정한 16기 의장 선거의 후보자 등록 마감시한은 지난달 15일. 한총련은 내부 합의를 거쳐 전남 지역 한 대학의 총학생회장 최모 씨를 단독 후보로 내정했지만 최 씨는 출마를 포기했다.
한총련의 한 관계자는 30일 “최 씨는 3차례 열린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과반이 넘는 지지를 받아 (의장 후보로) 내정된 상태였다”며 “그러나 최 씨는 가족의 완강한 만류에 부닥쳐 결국 출마를 포기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단독 후보의 출마가 무산되면서 한총련 지도부에 비상이 걸렸다. 결국 한 달간 후보 등록 시한을 연장한 뒤 후보 선출을 시도했으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서울의 한 사립대 관계자는 “한총련 지도부가 서울의 한 대학과 영남 지역의 한 대학 총학생회장에게 출마 의사를 타진했으나 두 사람 모두 ‘학내 활동에 주력하겠다’며 출마를 거부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후보 등록 시한 연장에도 불구하고 출마자가 나오지 않자 한총련은 29일 16기 집행부를 비상대책위(비대위) 체제로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의장이 선출되지 않은 채 비대위 체제가 들어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보기관의 한 관계자는 “한총련 의장이 지금까지 수배 등 사법조치를 당해왔고, 새 정부 들어 불법집회와 단체에 대한 잣대가 엄격해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총학생회장들이) 출마를 주저했을 것”이라며 “하지만 호남지역이 주축인 남총련 세력이 강해 한총련의 명맥은 유지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 186개 대학에서 40여 개 대학으로…
1993년 출범 당시 전국 186개에 달했던 한총련 소속 대학은 현재 40여 개로 급락했다.
전문가들은 한총련의 세력이 위축된 배경으로 이념 중심의 투쟁과 과격한 투쟁 방식, 학생들의 인식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점 등을 꼽고 있다.
한총련은 출범 이후 시대적 변화를 외면한 채 반미(反美)와 자주통일 등 이념 투쟁과 강경 일변도의 투쟁 방식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1996년 8월 정부의 ‘범청학련 통일대축전’ 원천 봉쇄 방침에 맞서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연세대 건물을 점거한 ‘연세대 사태’가 대학생들의 등을 돌리게 만든 분수령이 됐다. 이 사태로 한총련 소속 학생 460여 명이 구속됐고, 시위 진압 과정에서 의경 1명이 숨져 여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군부정권 대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주화의 성과가 가시화되는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한총련이 벌인 ‘반미친북’의 강경투쟁 노선에 학생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법원은 1998년부터 한총련과 그 지도부에 대해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로 규정했다.
이성호 단국대 총학생회장은 “한총련이 이념을 떠나 학생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합리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데 완전히 실패해 영향력이 감소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과거 학생운동의 중추세력이었던 서울대 총학생회가 2006년 “학생회 주인인 학우들을 학생운동 객체로 전락시켰다”며 한총련을 탈퇴하는 등 대학가에 ‘탈(脫)한총련’ 바람이 거세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총련
1987년 민주화 바람으로 탄생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계승해 1993년 발족했다. 각 대학 대표자들의 협의체 형식으로 운영되던 전대협과 달리 한총련은 각 대학 총학생회장과 단과대학 학생회장까지 포함하는 1600여 명의 대의원 체제를 구축해 더 강력한 조직체계를 갖췄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정혜진 기자 hye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