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진이 예슬이 악몽 생생한데 “경찰은 죽어야 뛰나”

  • 입력 2008년 3월 31일 19시 39분


일산 초등학생 납치 미수사건의 수사본부가 차려진 경기 일산경찰서에는 31일 하루 종일 분노한 시민들의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전국에서 걸려오는 항의전화로 5개 라인이 설치된 일산 경찰서 상황실은 전화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경찰서 홈페이지에도 분노한 네티즌들의 글이 쏟아졌다.

이명박 대통령도 이날 오후 직접 수사본부를 찾아 경찰의 안이한 근무자세를 질타했다.

경기도 고양교육청은 이날 관내 73개 초등학교에 긴급 공문을 발송하고 아동 보호에 만전을 기해 줄 것을 지시했다.

●전화폭탄 맞은 수사본부

26일 처음 신고를 받고 사건 현장에 출동했던 일산경찰서 대화지구대에는 이날 시민들의 '전화폭탄'이 터졌다.


▲ 영상제공 : 일산경찰서

출동 대원들이 폐쇄회로(CC)TV를 확보하지 않고 일산경찰서에 '단순 폭력 사건'으로 보고서를 올리는 등 초동 수사에 문제를 드러낸 만큼 대화지구대로 향하는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대화지구대 관계자는 "아침부터 수 백 통의 항의전화가 오고 있다"며 "항의 전화를 처리하느라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것도 힘들 정도"라며 "지구대에서부터 초동 수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으니 이번 사건 관련 경찰들은 모두 옷을 벗어라는 전화도 여러 통이 된다"고 밝혔다.

지구대와 일산경찰서에 걸려온 항의전화의 대부분은 주부들이었다.

초등학생 딸을 둔 한 주부는 "요즘 경찰이 일 하는 걸 보면 시체 찾는 일을 하는 사람들 같다"며 "사람이 죽거나 사고가 터진 뒤에야 제대로 움직이는 것이 경찰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건이 일어난 아파트에 거주하는 주모(38·여) 씨도 "딸을 기르는 사람이라면 납치나 성폭행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며 "경찰관들도 딸들이 있을 텐데 혜진이와 예슬이 말고 또다른 피해자를 보고 싶은 거냐"고 분을 삭이지 못했다.

경찰 관계자는 "다짜고짜 욕설을 퍼붓는 전화가 대부분"이라며 "경찰의 무사안일로 빚어진 일인 만큼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 영상제공 : 일산경찰서

●"일선 경찰(의 기강)이 너무 해이해져 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오후 일산경찰서를 전격 방문해 이기태 서장 등으로부터 "(일선에서) 폭력 사건으로 착각해 사건 처리가 지연됐다"는 보고를 받은 뒤 "어린 여아를 대상으로 한 것을 폭행 사건으로 다룬다는 게 온당하냐. 이는 사건을 간단히 끝내려는 경찰의 (안이한) 조치"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 대통령은 "일선 경찰은 아직도 생명의 귀중함을 소홀히 하고 있다"며 "사건만 생기면 피해를 입고 사후약방문으로 처리하는데 경찰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내가 직접) 뛰어 나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여러분처럼 이러면(이렇게 대처하면) 어린 자녀를 가진 국민들이 어떻게 (안심) 하겠느냐" "어떻게 이렇게 소홀히 할 수 있냐"며 잇따라 질타한 뒤 "아무튼 범인을 빨리 잡으라"고 지시했다.

이 대통령은 경찰서 방문 내내 인상이 굳어있었고 결국 이 서장은 이 대통령의 지적에 "잘못했습니다"라고 사과했다.

●제자리 걸음 수사

어청수 경찰청장까지 이날 오후 수사본부를 방문했으나 경찰 수사는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산경찰서는 이날 경찰인력 300여명을 투입해 탐문수색을 벌였고, 전과자 조사 등을 통해 용의자의 신원 파악에 나섰다.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과학수사팀이 채취한 지문도 선명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경찰은 사건 발생일인 26일 용의자와 비슷한 인상착의의 남자를 봤다는 목격자의 진술을 확보해 수사 중이다.

사고 발생 지점에서 5분여 거리의 아파트 단지에 사는 여교사 A 씨는 "26일 오후 9시경 아파트 현관 앞에서 TV에서 본 용의자와 비슷한 남자가 위협적으로 다가와 이웃주민의 도움으로 피신했다"며 "옷차림과 머리 스타일이 TV에서 본 사람과 비슷해 더 놀랬다"고 말했다.

한편 경찰은 납치미수 사건을 단순폭행으로 보고하고 사흘이 지나서야 폐쇄회로(CC)TV 화면을 확보하는 등 수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자체 감찰을 벌이고 있다.

고양=이세형기자 turt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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