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나래 펼친 학생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정호승 ‘봄길’) 대구 달성군 다사읍의 다사중학교 학생들에게 시(詩)는 ‘밥’이다. 밥처럼 날마다 ‘먹기’ 때문이다. 전교생 700명은 ‘봄길’을 비롯해 ‘그리움’(유치환), ‘산에 언덕에’(신동엽) 등의 시를 거의 외워 낭독할 수 있다. 지난달 한 달 동안 수십 번 읽고 음미했기 때문이다.》
이달 들어 학생들은 ‘감자떡’(권정생)과 ‘참 좋은 당신’(김용택) 등 네 편의 시를 외우고 있다.
23일 오전 국어 수업을 마친 2학년 최혜진(14) 양은 “‘봄길’을 읽으면 내가 봄길 속으로 걸어가는 것 같다”며 “시를 많이 읽으니 시를 짓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고 말했다.
대구 수성구의 중학교에 근무하다 지난달 이 학교에 온 최남길(48·여) 국어 교사는 ‘어떻게 하면 차분하게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수업 시작 전 시 읽기를 생각해냈다.
막연하게 시를 읽으라고 지시하면 오히려 거부감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춘 ‘다솔 시첩’을 만들었다. 다솔은 ‘최고’라는 뜻의 우리말로 다사중의 상징어.
전교생은 지난달부터 올해 12월까지 3, 4편의 시가 담긴 A4용지 14장을 반으로 접어 각자 개성 있게 다솔 시첩을 만들어 가방에 넣어 다닌다. 시첩의 종이를 고정시킬 때는 접착제가 아닌 바느질로 했다. 시를 위한 작은 정성인 셈이다.
학생들은 국어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모두 의자에 앉아 시첩을 펼치고 시를 합창한다. 국어 선생님이 들어오면 함께 시를 낭독한다.
최 교사는 “시는 언어로 그리는 그림이어서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며 “학생들이 같은 시를 읽어도 머릿속에 그리는 상상의 세계는 모두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시를 모두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5분에 불과하지만 1년이면 40여 편, 3년이면 100여 편의 시를 감상할 수 있다. 이 정도면 고교 과정에 필요한 시 공부도 거의 다 할 수 있다는 게 교사들의 설명이다.
교직에 첫발을 내디딘 박선영(24·여) 국어 교사는 “수업이 어수선하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시 덕분에 분위기가 너무 좋다”며 “학생들과 함께 시를 읽는 짧은 시간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전교학생회장인 3학년 이우동(15) 군은 ‘섬진강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김용택 시인의 ‘참 좋은 당신’을 무척 아낀다.
이 군은 “다솔 시첩을 펼치면 ‘참 좋은 당신’이라는 느낌이 든다”며 “고등학교에 가서도 이 시첩을 활용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 학교 김병호(60) 교장은 매달 한 편의 시를 선정해 현관에 큼지막하게 써서 걸어둔다. 그는 “복도를 지나다 들리는 시 읊는 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 아닐까 싶다”며 “아이들 덕분에 나도 시 읽는 시간이 늘어났다”고 밝혔다.
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