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성소피아 성당은 세계 4대 교회 건축물 중 하나로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재건됐다. 이후 성소피아 성당은 그리스도교의 대성당으로 사용되었으나 비잔틴 제국이 이슬람교도인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점령됐을 때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로 이용됐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요소가 동시에 공존하는 성소피아 성당은 현재 어떤 모습일까?
성소피아 성당에 담겨 있는 터키 역사의 의미를 해석해 보자. 》
비잔틴 제국은 동로마 제국을 말한다. 현재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의 옛 이름인 콘스탄티노플에 도읍을 정한 동로마제국은 로마 제국이 동서로 나뉘게 된 395년부터 1453년 오스만튀르크의 술탄 메메트2세의 침략으로 멸망할 때가지 약 1000년 넘게 지속된 제국이다. 동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한 서로마제국 이후에도 1000년을 더 존속하였다.
성소피아 성당이 건립되었을 당시 이름은 하기아 소피아(Hagia Sofia)였다. 터키 사람들은 아야 소피아(Aya Sofia)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의미는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지혜라는 뜻으로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현존하는 성소피아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다시 지어진 것이다. 4세기에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그 후계자 시대에 건조된 성당이 532년의 반란으로 파손된 뒤,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새로운 설계에 근거해 재건을 시작했다.
세계 4대 교회 건축물로 손꼽힐 만큼 아름다운 성소피아 성당의 개장식은 대단히 화려했으며, 황제가 내부의 화려함을 보았을 때, “오,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소”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잔틴 제국 당시, 성소피아 성당은 황제 대관식, 또는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등의 중요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성소피아 성당은 아름다움만큼이나 고난이 많은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레오 3세 황제가 성상의 숭배를 금하는 칙령을(성상금지령)을 발하면서 성소피아 성당의 많은 모자이크와 프레스코들이 손실됐다. 또한 1204년에 일어난 제4차 십자군 전쟁 때는 십자군들의 약탈 대상이 되고, 그 후에 제작된 모자이크도 15세기 이후 이슬람교인 오스만튀르크의 점령하에 거의 없어져 버렸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비잔틴 제국의 대표적인 성당으로 자리 잡은 성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로 바뀌기도 한다. 비잔틴을 정복한 술탄 메메트2세는 대부분의 성당을 파괴하였으나 성소피아 성당의 위용과 아름다움에 반해 파괴하지 않고 성당을 모스크 사원으로 변모시키도록 지시한다. 결국 성소피아 성당은 그리스도교의 특징을 보여주는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 벽화에 이슬람교 코란의 금문자, 미나레트 등이 동시에 뒤엉켜 탄생한 새로운 예술적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성소피아 성당을 더욱 빛나게 하는 또 하나의 건축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소피아 성당의 맞은편에 있는 블루 모스크이다. 사원의 내부가 중국풍의 청색 타일로 장식되었기 때문에 일명 블루 모스크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모스크의 원래 이름은 술탄 아멧 모스크이다. 술탄 아멧 1세가 성소피아 성당을 능가하는 모스크를 세우도록 명령하는 바람에 성소피아 성당 맞은편에 웅장한 규모로 1609년부터 건립된 사원이다. 일반적인 이슬람 사원에 있는 첨탑은 2개나 4개인 데 반해 이 사원은 특이하게 6개이다. 이 아름다운 모스크는 기둥과 돔 벽에 명암이 있는 99가지의 푸른 타일을 사용함으로써 더 유명해지게 되었다. 현존하는 터키 최대의 이슬람 사원으로 성소피아 대성당과 맞먹는 규모지만 건축학적인 아름다움은 성소피아 성당을 능가한다고 한다. 성소피아 성당과 더불어 이스탄불 최대의 명소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