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세지는 영어광풍… 한국어 지키기 목청도 커지지만
순수한 우리말 있을까, 그 실체는?
생각의 시작
요사이 우리 사회는 터진 봇물처럼 마구 흘러드는 외래 문명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다. (중략) 문화 인류학자들은 이번 세기가 끝나기 전에 대부분의 언어들이 이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예측한다. 언어를 잃는다는 것은 곧 그 언어로 세운 문화도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토록 긍지를 갖고 있는 우리말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중략) 하지만 영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말이다. 그러나 우리말을 제대로 세우지 않고 영어를 들여오는 일은 우리 개구리들을 돌보지 않은 채 황소개구리를 들여온 우를 또다시 범하는 것이다.[국어(상), ‘황소개구리와 우리말’]
|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는 외래종인 황소개구리, 블루길 등의 유입이 토종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처럼 영어가 우리말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토종이 제자리를 지키면 외래종이 쉽사리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말을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이 선행될 때 우리말을 당당히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말’의 개념은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 걸까. 먼저 사전을 살펴보면 우리말은 ‘우리 겨레가 쓰는 고유의 말’ 혹은 ‘우리나라 사람의 말’이라고 나와 있다. 이에 따르면 우리말에서의 ‘우리’가 지칭하는 대상은 단일민족인 한민족일 수도 있고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 안에서 삶을 영유하는 사람들로 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든 사전적 의미의 우리말 규정은 참 배타적이다. 우리 겨레가 아닌 많은 사람들의 언어는 우리말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또한 ‘고유’가 아닌 많은 언어도 우리말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말은 범위가 고정되어 있고 변하지 않는 실체로 존재한다는 사고가 전제된 것이다. 그러나 언어가 고정 불변의 순수한 실체로 존재할 수 있을까?
뒤집어 보자
여럿 있다는 의미의 중층성이었다. 그러나 한국어는 그 내부적 기원에서도 중층적이다. 이를테면,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 흔히 고유어라고 부르는 어휘와 중국이나 일본에서 건너온 한자어들과 그 밖의 외래 어휘를 제 어휘장 안에 시간 축과 나란히 포개 왔다는 점에서 한국어는 중층적이다. 그러나 이런 외래어가 쏟아 들어오기 전의 한국어도 중층적이었을 수 있다.
한국어의 내부적 중층성은 ‘순수한 한국어’라는 것을 확정할 수 없게 하고, 그 외부적 중층성은 ‘한국어’라는 것 자체의 경계를 확정하기 어렵게 한다. 그것은 우리가 한국어라고 부르는 대상이 대단히 모호하고 물렁물렁하다는 뜻이다. 그런 모호함과 물렁물렁함을 곱씹어보고 나면, 언어를 둘러싼 갈등에 지불하는 정열을 꽤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고종석, ‘말들의 풍경’]
|
언어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해가는 생물체 같은 것이다. 이 세상에 태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언어는 없다. ‘한국어’ 또한 여러 이질적 요소들이 섞여서 구성되어온 감염된 언어였고, 지금도 감염되고 있다. 오히려 이러한 과정은 우리말과 우리의 삶을 좀 더 풍부하고 아름답게 해 줄 수 있다.
한번 더 뒤집어 보자
중요한 것은 관념 속의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라 일상에서 소통되는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한국어’다. 이를 위해 한국어는 언제나 열려 있었고 또한 열려 있어야 한다. ‘순수한 한국어’를 지키려는 시도는 오히려 한국어 자체를 ‘수척(瘦瘠)’한 언어로 만드는 행위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김수영 청솔아우름 통합 논술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