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역사에서 논술의 길 찾기]루스벨트의 뉴딜 정책

  • 입력 2008년 5월 26일 02시 58분


《1929년 미국 대공황 때 뉴딜 정책의 성공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성공이기도 했지만 경제 이론의 성공이기도 했다. 국가 주도하에 이루어진 뉴딜 정책은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과 상반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는 ‘유효 수요 창출을 위한 국가의 개입’을 옹호하는 케인스주의가 자유방임주의에 가하는 이론적 타격이기도 했다. 과연 뉴딜 정책은 ‘정부 개입’이라는 케인스주의의 대표적인 성공 모델일까?》

대공황 치유한 뉴딜, 근본 처방이었나 반짝 약효였나

뉴딜 정책에 대한 쟁점 중 하나는 ‘알려져 있는 것처럼 그렇게 효과적인 것이었는가?’이다. 두 학파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어떻게 운영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경쟁했다. 하지만 오늘날 두 정책 중 하나를 극단적으로 채택한 나라는 거의 없다.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금과옥조처럼 신봉하는 미국에서도 국책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를 통한 금리 조절 정책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자유방임주의 정책을 지속한 결과 나타난 1929년 대공황의 참상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1920년대 내내 미국은 이른바 ‘재즈 시대’라고 부르는 황금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1929년 10월 24일 급작스럽게 뉴욕 주식시장이 붕괴했고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과잉생산을 따라가지 못하는 대중의 미미한 구매력이 대공황의 큰 원인이었다. 또한 치솟는 주식에 함부로 투자했던 거대 은행들은 결제대금을 갚지 못한 기업들과 동시에 연쇄 도산하기 시작했다.

대공황이 시작되자 1929년부터 1931년까지 미국 산업 생산은 크게 하락했으며 실업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허버트 후버는 기업 파산과 정리해고 등 구조조정과 완전한 자유시장 정책을 추진해 위기를 탈출하고자 했지만 1931년에 들어서자 기업들은 물론 미국 경제 전체가 파산할 지경에 이르게 됐다.

결국 후버는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참패했다. 루스벨트는 경제사회의 재건, 빈곤과 불안에 떠는 국민의 구제 등을 목적으로 한 새로운 정책, 즉 ‘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뉴딜(신정책)’을 약속함으로써 공화당의 후버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미국 의회가 대규모 고용 창출을 위해 주당 노동시간을 30시간으로 단축하는 법률 제정까지 검토할 만큼 상황은 절박했다.

미국 정부는 실업자들에게 긴급 원조를 제공하고 임시직과 건설 사업의 일자리를 마련했다. 또한 값싼 전력의 대량 공급, 홍수 예방, 수로 개선, 질산 비료 생산 등의 목적으로 테네시 강 유역 개발 사업을 실시했다. 농민들에게는 농사를 짓지 않게 하는 대신 보조금을 지급하고 팔리지 않고 남아도는 곡물을 구입·폐기해 곡물 가격을 올리려고 노력했다. 1935년에는 와그너법이라는 노동조합보호법을 제정해 노동조합 결성 조건을 완화하고 노동조합의 조직력이 강화되게 했다. 여기에는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쉽게 함으로써 소비 수요를 증대하려는 의도가 포함돼 있었다. 공공사업진흥국(WPA)은 8년 동안 쉴 새 없이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냈다.

이런 정책들은 제한적이나마 경제 회복에 도움이 됐다. 이러한 성과 덕분에 1936년 대통령으로 재선된 루스벨트는 “부유한 사람들을 더욱 부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의 기준이다.”라고 주장하며 뉴딜의 방향 전환을 분명히 밝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유시장 방임주의 신봉자들은 1929년 대공황을 극복하는 데에 무기력했던 반면, 경제학계에 새롭게 등장한 케인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올바름을 역설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후일 뉴딜 정책에 대한 비판자들은 루스벨트의 정책적 성과가 처음부터 신통치 않았고 ‘일시적’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은 실업자가 1300만 명에서 1200만 명으로 줄어든 것은 그다지 큰 성과가 아니며, 다른 경제 지표들의 회복세도 미미한 데 그쳤다고 주장한다. 또한 1937년 8월이 되자 미국 역사상 가장 급격한 경기 후퇴가 시작돼 1932년 이후 여러 지표에서 나타난 성공의 절반이 사라졌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미국 경제가 완전한 전시 체제로 재편된 뒤에야 군수품 생산 산업을 통해서 완전 고용을 이룰 수 있었고, 농가 수익도 1941년이 돼서야 1929년 수준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뉴딜 정책 옹호자들도 1937년부터 다시 시작된 급속한 경기 후퇴를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뉴딜의 진정한 성과는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라고 강조한다. 1935∼1939년에 제정된 사회보장법은 노인수당, 과부수당, 실업보상 등을 마련해 오늘날 미국 사회복지 제도의 기초가 됐다는 것이다.

박승렬 LC교육연구소장


심화학습

본문을 참고하여 대공황의 원인을 분석하고, 뉴딜 정책의 장단점에 관하여 토론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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