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의 대몽항쟁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린다.
고려인의 자주정신, 몽골에 반발하는 민중의 강한 의지로 평가되는가 하면 단순히 최씨 무신정권의 호위병에 지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삼별초는 반외세에 대한 자주민족의 항쟁인가, 아니면 무신정권의 기반으로서 특권적 지위를 지키기 위한수단에 불과했는가? 》
대몽항쟁 삼별초
자주-반외세의 선봉? 무신정권 사병 불과?
먼저 고려 후기 등장한 무신정권의 성립 배경과 몽골의 한반도 침략을 살펴보자. 삼별초를 만든 고려 무신정권은 이자겸과 묘청의 난 등 중앙귀족사회의 동요와 몰락 과정을 거쳐 성립됐다. 무신정권은 1170년 보현원에서의 난을 계기로 집권을 시작해 1270년(원종 11)까지 100년간 계속됐다.
최씨 무신정권기에 중국 땅에서는 칭기즈칸이 여러 갈래로 흩어져 살던 몽골족을 통일하고 몽골 제국을 세웠다. 고려는 1219년 몽골과 강동성의 거란족을 평정한 것을 계기로 외교관계를 맺게 됐고 이후 몽골로부터 막대한 공물을 강요당했다. 몽골은 1225년 발생한 몽골 사신 저고여의 암살사건을 빌미로 1231∼1259년까지 6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했다. 하지만 암살사건은 아시아 제압의 일환으로 미리 계획해둔 몽골의 계획적인 군사행동이었다.
몽골의 침략에 대해 고려 정부의 여론은 둘로 분열됐다.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무신정권과 삼별초는 몽골과 끝까지 항쟁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원종을 중심으로 한 문신들은 개경으로 환도하여 몽골과 강화하기를 원했다. 이런 혼란 속에 몽골은 고려 왕이 직접 몽골에 와서 인사하고, 개경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을 조건으로 화해를 요청했다. 원종은 몽골을 방문하고 개경으로 돌아와 수도를 옮겼다.
삼별초는 개경으로 돌아가는 것은 몽골에 대한 굴욕적인 항복이라며 원종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배중손의 지휘 아래 강화도에서 조직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먼저 강화도와 육지 사이의 교통을 끊고,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옹립했다. 새 관청을 설치하고 관리도 임명하여 정부와 대립하는 반몽 정권을 수립했다. 이후 세력이 약해진 삼별초는 전남 진도, 제주도로 옮겨가며 고려 정부와 몽골의 연합군에 대항하였으나 결국 김통정의 자결로 4년간의 싸움은 막을 내리게 됐다.
삼별초의 대몽항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고려인의 자주성과 강한 민중 의지가 표현되었다는 점에 집중한다. 삼별초의 항쟁은 원종이 몽골 정부에 입조한 일에서 시작됐다. 이는 고려가 완전히 몽골의 예속국이 됨을 공식적으로 밝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원종이 몽골의 요구대로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지나치게 사대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삼별초의 입장과는 상반된 것이었고, 삼별초의 항쟁은 결국 고려인의 자주정신의 발로라는 것이다.
이들은 삼별초가 여·몽 연합군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4년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남도 각처의 농민들이 삼별초의 항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정부와 몽골군에 대하여 투쟁하려는 굳은 결의가 민중 사회의 내부에서 고양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민중들의 저항정신이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서로 동조하게 된 것은 삼별초 항쟁의 역사적 성격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삼별초가 일반 백성의 호응을 얻으면서 민족항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는 결과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삼별초는 무신정권 초기 최우가 도둑을 잡기 위해 만든 야별초에서 비롯됐고 당시 무신정권에 반기를 드는 농민과 천민들도 ‘도둑’에 포함되어 단속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즉, 초기의 삼별초는 무신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을 잡아들이며 무신들의 호위병 노릇을 하였던 것이다. 무신집권자들은 삼별초에 녹봉과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었고, 삼별초는 권력에 동원되어 정권 교체에 이용되는 등 무신정권을 지탱하는 주요 군사력이 되었다.
심화학습
삼별초의 대몽항쟁 과정을 살펴보고, 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하여 토론하여 보자.
박승렬 LC교육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