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열이가 가고싶어했던 시청 오늘 갈수있게돼
학생-경찰 충돌없이 촛불집회 무사히 마쳤으면”
87년과 달리 ‘넥타이 부대’ 참여 예상보다 저조
“21년 전 우리 한열이가 그렇게도 가고 싶어 했던 시청에 오늘 갈 수 있게 돼 감사합니다. 요즘처럼 집회에서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최루탄도 없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1987년 6월 교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숨졌던 이한열 씨의 어머니 배은심(사진) 씨는 10일 아들의 영정을 안고 서울 연세대에서 광화문으로 향했다.
배 씨는 “우리 한열이의 영정을 안고 가는데 불상사가 있어서야 되겠느냐. 부디 학생들이 경찰과 아무런 충돌 없이 무사히 집회를 마쳤으면 좋겠다”면서 “정부는 공권력으로 국민의 소리를 막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피를 흘리던 이 씨의 모습은 ‘넥타이 부대’로 대표되는 일반 시민의 공분을 일으켰다. 폭발하듯 분출한 거리의 민심은 6·10항쟁으로 이어져 오늘의 민주주의를 만들었다.
촛불집회를 주도한 국민대책회의는 6·10항쟁 21주년을 맞아 ‘넥타이 부대’의 참여를 적극 유도했다. 인터넷 등을 통해 칼퇴근, 조퇴, 휴가를 거론하며 종용했지만 이들의 참여는 예상보다 저조했다.
6·10항쟁의 주력은 ‘넥타이 부대’로 표현되는 일반 시민과 대학생이었다. 촛불집회는 10대 청소년과 주부까지 합세한 점이 눈에 띈다.
시민·사회단체의 역할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이번에는 ‘1인 미디어’와 인터넷을 활용한 참여가 시대 변화를 실감하게 하는 특징이다.
▽같은 날 모였지만 명분은 달라=6·10항쟁 당시 대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나온 데는 박종철 씨 고문치사 사건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후 이한열 씨가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는 사진까지 공개되면서 국민적 분노가 극에 달했다.
군사독재 정권에 억눌렸던 시민의식은 이를 계기로 한꺼번에 폭발했다. 대학생과 재야단체가 중심이던 시위대는 ‘넥타이 부대’까지 참여하는 양상으로 급격히 확산됐다.
10대 여고생을 중심으로 시작한 촛불집회는 점차 대학생과 시민단체 및 노조를 중심으로 조직화되는 양상을 보여 6·10항쟁과는 차이가 있다. 6·10항쟁 때는 최루탄이 난무하고 쇠파이프와 보도블록, 화염병이 동원되는 등 격렬했지만 올해의 경우 10만 명에 가까운 시위대가 모였지만 대체로 축제나 놀이처럼 자유분방하게 진행됐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