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두 형제가 있었다고 해요. 형은 성실했는데, 아우는 놀기를 좋아했어요. 아우는 심지어 아버지에게 떼를 써서 유산을 미리 물려받고는 그 돈을 흥청망청 다 써버렸지요. 돈이 떨어진 아우는 오갈 데 없는 거지가 되고 말았어요. 뒤늦게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그래, 기왕 굶어죽을 바에야 차라리 아버지한테로 돌아가는 게 어떨까. 아니야, 몽둥이를 휘둘러서 나를 쫓아 내실지도 몰라….”
이런저런 궁리 끝에 못난 아우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혔어요.
이 이야기는 ‘돌아온 탕자’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성서의 비유 한 토막입니다. 탕자는 ‘방탕한 자식’이라는 뜻이지요. 이야기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늙은 아버지는 집 나간 못된 자식을 내치지 않고 다시 품으로 거두어들였다고 해요. 그뿐이 아니었어요.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 새 옷을 갈아입히고 반지를 끼워주는가 하면, 큰 잔치를 벌여서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기쁨을 나누었다고 해요.
○ 렘브란트, 어두운 침묵의 그림을 그리다
첫째 그림은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입니다. 렘브란트는 오랜 방황 끝에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른쪽 옆에 멀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람은 방금 밭에서 일을 하다가 돌아온 첫째 아들, 그러니까 탕자의 형인 것 같네요. 또 뒤로 어슴푸레 보이는 사람들은 이 집에서 일하는 하인이거나 친척들이 아닐까 싶군요. 렘브란트는 그림을 무척 어둡게 그렸어요. 한참 동안 그림을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인물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할 정도니까, 무척 불친절한 화가인 셈이지요.
맨 앞쪽에 무릎을 꿇은 사람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못된 아들이지요. 한때 떵떵거리던 모습은 간데없고, 너덜너덜한 누더기에다 밑창이 다 터진 신발하며, 행색이 남루하기 이를 데 없네요. 주인공은 마침 우리로부터 등을 돌리고 앉아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아요. 그의 얼굴을 돌려서 본다면 아마도 후회의 눈물이 얼룩져 있을 것 같네요.
속죄하는 아들 앞에 서 있는 늙은 아버지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채 아들의 어깨를 감싸고 등을 어루만집니다. 뉘우침으로 들썩이는 어깨를 다독이는 아버지의 투박한 손길은 한없는 사랑으로 밝게 빛납니다. 주변에 둘러선 사람들은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하게 보입니다. 이들은 아마도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챌까봐 억지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그림에는 위대한 영웅이 없습니다. 근사한 미인도 당연히 없고요. 과장이나 꾸밈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을 말하고 있지요.
렘브란트는 마치 그림을 아름답게 그리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렘브란트는 성서의 비유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 침묵과 정적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어요. 그의 붓은 너무나 조용해서 그림 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지요. 혹시 아주 밝은 귀를 가진 사람이라면 돌아온 탕자의 자책과 회한을 뱉어내는 들릴 듯 말 듯한 숨소리나 뒤쪽에 서 있는 사람의 헛기침 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요. 혹시 조금 더 밝은 귀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늙은 아버지의 손끝에서 묻어나오는 너그럽고 다정한 속삭임까지 들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렘브란트는 빛과 어둠, 그리고 아주 단순한 몇 가지의 색채만 가지고 진실한 교훈의 깊은 울림을 만들어냈어요. 붓끝으로 인간의 내면을 어루만지다니, 렘브란트를 두고 인간에 대한 가장 깊은 성찰을 이룬 화가라고 부르는 것이 조금도 지나친 찬사가 아닌 것 같네요.
○ 루벤스, 밝고 사랑스러운 그림을 그리다
둘째 그림은 루벤스가 그린 ‘삼미신’입니다. 루벤스는 바로크 시대 플랑드르의 대표적인 제단화가였다고 해요. 제단화는 교회에서도 가장 성스러운 자리를 차지하는 중요한 예술작품이라서, 도시의 시민과 순례자들이 교회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그 앞으로 다가가서 무릎을 꿇고 간절한 기도를 올리곤 했어요. 제단화를 그리는 화가라는 이름만으로도 더 높은 명성을 기대할 수 없는 최고의 지위를 얻은 것과 같았어요. 그러나 루벤스는 제단화뿐 아니라 역사화, 신화, 풍경화, 초상화에서도 훌륭한 솜씨를 발휘했어요. 특히 루벤스가 그린 신화 그림은 멀리 이탈리아의 귀족들 사이에서도 수집 열풍이 불 만큼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고 해요. ‘삼미신’은 루벤스가 그린 수많은 신화 그림들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작품으로 꼽히지요.
삼미신은 젊고 아름다운 세 명의 여신이 제각기 선물을 나누는 장면을 소재로 하고 있어요. 소중한 것을 주고, 받고, 되돌리는 나눔의 행복을 실천하는 사랑스러운 여인들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그들은 마치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것 같아요. 그림 배경의 흐드러진 꽃과 풍요로운 들판이 그림을 더욱 밝고 싱그럽게 만드네요.
○ 예술은 시대를 반영할까, 아니면 초월할까
루벤스와 렘브란트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 두 화가 사이의 차이점을 뚜렷하게 읽을 수 있어요. 루벤스가 아침 이슬을 머금은 싱싱한 꽃송이라면, 렘브란트는 마치 벼락을 맞고 말라비틀어진 고목처럼 쓸쓸한 느낌이 들어요.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과 현실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루벤스는 전쟁과 참화로 얼룩진 시대를 살았어요. 1648년에야 종식된 30년 전쟁의 끄트머리, 북유럽을 덮친 재앙의 그늘에서 ‘삼미신’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어요. 루벤스는 기아와 살육의 현장을 목격했지만, 언젠가 다가올 평화와 풍요의 시대를 상상했어요. 루벤스에게 붓은 꿈을 꾸기 위한 도구였던 셈이지요.
한편, ‘돌아온 탕자’를 그린 렘브란트는 네덜란드가 북유럽에서 가장 융성했던 시대를 살았어요. 교차무역과 증권거래로 벌어들인 재화가 도시를 살찌웠고, 예술가들은 황금의 손을 가진 리디아의 왕 미다스가 부럽지 않았어요. 넘쳐나는 풍요의 시대에 렘브란트는 인간의 남루하고 황폐한 모습에 주목했어요. 그의 붓은 늘어가는 죄악의 무게만큼 자꾸 가벼워지는 도덕의 저울과 같았어요.
노성두 서양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