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진 재점화 - 급기동 등
한계상황까지 위험한 실험
연말이면 9년 무사고 기록
마일 전방 타깃 확인. 스리, 투, 원, 라이플(Rifle·매버릭 공대지미사일 발사를 의미하는 공군통신용어)!”
지난달 8일 강원 강릉시 앞바다 약 3000m 상공.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비행하는 국산 초음속 고등전투훈련기인 TA-50에서 미사일 2기가 시뻘건 불꽃을 내뿜으며 발사됐다.
미사일이 잇달아 해상 표적에 명중하면서 거대한 물기둥이 치솟자 가슴 졸이며 화면을 보던 시험비행 조종사와 지상 기술요원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1주간 진행된 TA-50의 실무장 투하훈련이 대성공으로 마무리됐기 때문. TA-50의 우수성을 재확인하고, 한국형 전투기(KFX) 독자개발의 목표에 한발 더 다가선 순간이었다.
한국 항공기술의 결집체인 TA-50이 세계 정상급의 최첨단 훈련기로 평가받게 된 데는 시험비행 조종사(테스트 파일럿)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통상 항공기 개발에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투입된다. TA-50은 10여 년간 2조 원이 들어갔다. 갓 개발된 항공기를 양산하려면 시제기로 철저한 성능검사를 거쳐야 하는데 시험비행 조종사가 그 임무를 맡게 된다.
19일 찾은 경남 사천기지의 공군 52시험평가전대 281시험비행대대는 국내 유일의 시험비행부대다. 1999년 말 창설됐으며 현재 대위에서 중령까지 시험비행 조종사 10여 명이 기술지원팀과 함께 근무하고 있다.
전대장인 정영식(공사 32기) 대령은 “기량뿐 아니라 남다른 사명감과 열정을 갖춘 ‘베스트 파일럿’만이 시험비행 조종사가 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시험비행 조종사들은 항상 목숨을 담보로 임무를 수행한다. 최첨단 항공기라도 성능과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시제기인 만큼 비행 중 어떤 결함이나 돌발 상황이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
하지만 이들은 ‘불완전한 항공기’를 한계 상황까지 몰아 위험을 자초해 성능을 검증하고 평가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일반인이라면 몇 초 내 의식을 잃을 정도의 고난도 기동과 최고도 및 저고도 초음속 비행은 물론 비행 중 엔진 재점화, 갑작스러운 조종불능 상태에 빠뜨리는 급기동 등은 기본. 자칫 추락으로 직결될 수 있는 위험한 순간들이다.
빙결 방지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일반 항공기들은 피해 다니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281대대장인 정근화(공사 32기) 중령은 “특히 불완전한 항공기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는 실무장 훈련은 베테랑 파일럿들도 초긴장 상태가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외국에선 기계적 결함으로 발사된 미사일이 기체로 되돌아오거나 발사장치가 고장 나는 등의 사고로 조종사가 기체를 포기하고 비상 탈출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
281대대 시험비행 조종사들도 초음속 비행 도중 갑자기 엔진이 꺼지거나 착륙 과정에서 항공기 타이어가 파열되는 등 ‘아찔한 순간’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2년 8월부터 현재까지 TA-50 시제기 4대로 총 1400여 차례의 무사고 비행기록을 세웠다는 자부심이 남다르다. 올해 말이면 9년 무사고 기록을 수립하게 된다고 부대 측은 설명했다.
전투기 조종사처럼 시험비행 조종사의 일상도 비행임무와 평가회의의 연속이다. 하지만 성능시험 일정에 쫓겨 휴일도 포기한 채 조종간을 잡기 일쑤이고, 모든 비행 결과가 항공기 개발 일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데 따른 심리적 부담이 크다.
또 TA-50의 홍보를 위해 국내외 에어쇼에 참가해 시범비행을 하는 것도 이 부대의 임무다. 다음 달 국내 행사 때 시범비행이 계획된 정 중령은 “짧은 시간에 TA-50의 최고 성능을 보여주기 위해 고난도 기동을 계속 하다 보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지만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힘든 근무여건 때문에 시험비행 조종사 지원자는 갈수록 줄어 매년 1, 2명도 뽑기 힘든 실정이다. 지원을 결심했다 가족의 반대로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앞으로 공군은 KFX 개발 등 향후 시험평가 수요에 대비해 2010년부터 매년 2명의 시험비행 조종사를 자체 양성할 계획이다.
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
▼10억 들여 美 - 英서 양성▼
1인당 5억 생명보험 가입
시험비행 조종사가 탄생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당시 미국과 독일, 영국 등이 제트엔진이나 로켓엔진을 탑재한 항공기를 본격 개발하면서 그 성능을 테스트하는 조종사들이 각광을 받게 됐다.
미 공군 조종사 출신인 척 예거는 시험비행 조종사의 ‘대부’로 불린다. 2차 대전에 참전해 10여 대의 적기를 격추한 그는 전쟁이 끝난 뒤 시험비행 조종사로 변신해 1947년 X-1이라는 시험기를 타고 인류 최초로 음속 돌파 비행에 성공했다. 시험비행 조종사 후보는 주 기종의 비행시간이 750시간 이상으로 편대장까지 지낸 30세 안팎의 베테랑 조종사 가운데서 선발된다.
국내 양성기관이 없어 후보자들은 미국의 국립시험비행학교(NTPS)나 미 공군의 시험비행학교(ATPS), 영국의 왕립시험비행조종학교(ETPS) 등에서 1년간 위탁교육을 받는다. 교육 비용은 약 100만 달러(약 10억 원)에 달한다.
통상 시험비행 조종사로 임명되면 3년간 의무 복무를 해야 한다. 군 당국은 시험비행 조종사의 중요성과 위험한 근무 여건을 감안해 1인당 5억 원 상당의 생명보험을 들어주고 있다.
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