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명화, 생각의 캔버스]자연이 질투한 모사

  • 입력 2008년 6월 30일 02시 57분


벌을 속이고 나비를 유혹한 정물화… 神筆은 꽃과 풀 과일에 불멸을 칠하다

‘그림의 떡’이라는 말이 있지요. 붓으로 그린 음식은 아무리 먹음직스럽고 푸짐해도 집어먹을 수가 없으니 아무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강 건너 불구경 하는 것처럼, 군침을 삼키며 손가락을 빠는 도리밖에 없겠네요. 그림 속의 떡으로 배를 채우려고 하다가는 굶어죽기 십상이지요.

첫째 그림은 플랑드르의 화가 요하네스 바르스가 그린 꽃병 정물입니다. 그림의 떡이 그런 것처럼 그림 속의 꽃도 쓸모없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네요. 예술은 이처럼 때로 쓸모없는 것들을 추구하거나, 실제로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헛일에 지극 정성을 쏟곤 하지요.

그러나 잘 그린 꽃 그림을 보면 마음 한 구석이 밝아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마치 친한 친구들과 놀러 가서 함께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면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말이지요.

꽃병 속의 소담스러운 꽃들은 제각기 목을 빼고 서로 어깨를 밀쳐가며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어요. 와글와글 웃음꽃을 피우며 저마다 절정의 자태를 자랑하는 꽃들을 살펴보면, 화가의 꽃꽂이 솜씨가 여간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더군다나 붓으로 그린 꽃은 시드는 법도 없으니, 찌는 듯한 더위나 살을 에는 추위가 닥쳐와도 끄떡없을 것 같아요. 아침에 피는 꽃과 저녁에 피는 꽃, 계절의 순환을 기다려서 피고 지는 꽃들을 화가는 마음먹은 대로 그림 속에 얼마든지 그려 넣을 수 있으니, 예술은 시간의 질투에 결코 굴복할 필요가 없는 셈이지요.

화가의 붓은 따스한 햇살처럼 회화의 영토를 비추어서 한 톨의 씨앗으로부터 움을 틔우고, 꽃잎을 벌어지게 하며, 한해살이 꽃들에게 불멸의 영혼을 선물하지요. 화가 요하네스 바르스는 이름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작은’ 화가에 불과하지만, 꽃가루 알갱이조차 놓치지 않는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솜씨를 발휘했어요. 예술의 어머니로 일컫는 자연의 능력으로도 흉내 낼 수 없는 기적의 풍경을 완성했지요.

그런데 이 그림에는 우리의 눈길을 끄는 또 다른 소재가 있습니다. 나비와 벌 그리고 이름 모를 벌레들이 투명한 꽃병이 놓인 우묵 벽 가장자리에 여기저기 달라붙어 있어요. 콩알만 한 크기의 벌레들은 소리 없이 꾸물거리며 더듬이를 움직이는 것 같네요. 아마도 꽃향기의 달콤한 유혹에 이끌려서 이곳까지 날아들었나 봐요.

여기서 우리는 잠시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됩니다. 이 벌레들은 혹시 붓으로 그린 그림을 진짜 꽃이라고 착각하고 그림 바깥으로부터 날아든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정물 화가의 지극히 섬세한 솜씨가 자연의 눈을 속인 셈이 되지요. 꽃향기는 그림의 경계를 넘어서 우리에게까지 풍겨오는 것 같네요. 이처럼 정교한 정물화를 두고 ‘눈속임 그림’(트롱프외유)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해가 될 것 같아요.

17세기의 정물화가 으레 그런 것처럼 이 그림에는 또 다른 숨은 뜻이 있다고 해요. 가령 꽃에는 제각기 인간의 삶을 빗댄 슬프고 아름다운 꽃말이 깃들어 있어서, 다양한 교훈과 훈계의 의미를 담고 있어요. 가령 꽃병 가장 위쪽에 당당하게 자리 잡은 붉은 얼룩의 튤립은 ‘순교와 희생’을 가리키고, 아래쪽의 카네이션은 ‘신성한 사랑’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어요. 벌레들도 마찬가지지요. 벌레들은 달콤한 꽃향기의 유혹에 취했으니까 덧없는 하루살이 삶의 유혹과 타락을 상징하기도 하고, 못생긴 애벌레가 탈바꿈해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성충이 된다고 해서 내일의 희망과 부활을 상징하기도 해요.

단순한 꽃병 그림인 줄 알았는데, 그림 한 점 안에 이렇게 다양한 의미가 숨어 있다니 신기하기 짝이 없네요.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 그림은 ‘붓으로 그린 설교’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군요.

둘째 그림은 과일 정물을 다루고 있어요. 중국에서 수입한 청화백자 그릇에 먹음직스러운 사과와 포도송이가 수북하게 담겨 있네요. 잘 익은 무화과와 서양배도 고개를 내밀고 있군요. 그런데 이번에는 새들이 그림 속으로 날아들었어요. 그림 오른쪽 아래에는 포도 알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새들도 보이네요. 꽃향기에 취한 그림 속의 벌레들처럼 이 그림에 등장하는 새들도 무척 예민한 후각을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우리의 옛 고전 삼국유사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의 소나무에 새들이 날아들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어요. 새들이 처음에 나뭇가지에 앉아서 쉬려고 날아왔다가 벽에 머리를 박고는 짹 하고 외마디 소리를 내면서 추락했을 테지요. 진짜와 가짜 소나무를 구분 못한 새들의 ‘자연주의적 죽음’이 솔거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솔거보다 1000여 년 전, 고대 그리스에도 새들을 속일 만큼 뛰어난 솜씨를 가진 화가가 있었다고 해요. 그의 이름은 제욱시스였어요. 제욱시스는 어느 날 화가 파라시오스와 함께 그림 경기를 했어요. 누구의 실력이 으뜸인지 가릴 좋은 기회였지요. 두 사람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구경꾼들이 둘러선 가운데 제욱시스가 먼저 그림을 내놓았어요. 포도를 그린 그림이었다고 해요. 뚝뚝 물이 듣는 듯한 탐스러운 포도송이는 도저히 붓으로 그린 그림으로 보이지 않았어요. 구경꾼들이 넋을 잃고 그림을 감상하는데, 어디선가 새떼가 마구 날아들었다고 해요. 새들은 그림 속 포도송이를 먼저 쪼아 먹으려고 힘차게 날개를 퍼덕거리며 곧장 날아와서는 그만 꽁 하고 뇌진탕을 일으키며 줄줄이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어요.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이지요.

이처럼 ‘자연을 속이는 예술’에 대한 일화는 그야말로 열 손가락을 다 꼽아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풍부하게 남아 있어요. 구렁이 그림을 그려서 나무에 걸쳐놓았더니 새들이 지저귐을 멈추고 혼비백산해서 도망쳤다는 이야기, 아름다운 암놈 말을 그렸더니 수놈 말이 마구간을 뛰쳐나와 그림에게 달려들었다는 이야기, 몰래 금화를 숨기려고 벽 사이의 틈새에 넣으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붓으로 그린 얼룩이었다는 이야기, 초상화에 파리가 한 마리 앉아 있어서 날려 보내려고 손을 아무리 휘휘 저어도 날아가지 않더라는 이야기 따위가 수천 년 동안 화가의 공방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지금도 기록으로 남아 있지요.

이런 이야기들이 실제 사건을 설명하는지, 순전히 입담 좋은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인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러나 만약에 삼국유사의 솔거가 그리스의 화가 제욱시스를 만날 수 있었더라면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지 않았을까요?

노성두 서양미술사학자

【?】

삼국유사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의 소나무에 새들이 날아들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어요.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가 그린 탐스러운 포도송이를 보고 새떼들이 날아왔다는 기록도 있지요. 이렇게 정교하게 그려진 정물화들은 때론 ‘자연의 눈’을 감쪽같이 속이기도 한답니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그림, 과연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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