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 20대 중반의 두 젊은이가 선언(manifesto)을 내놓았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작은 팸플릿은 20세기를 전쟁과 혼란으로 가득 채웠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은 공산주의란 바로 이런 것임을 널리 알린 문서다.
그들은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말한다. 어느 시대에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들의 다툼이 있었다. 자본주의에서 부르주아지(bourgeoisie), 즉 가진 자들은 계급투쟁을 단순하게 만들어버렸다. 돈이 있으면 대접받고, 없으면 괄시받는다는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돈 앞에 평등하다. 자본주의는 오직 ‘냉혹한 현금계산’으로만 사람을 가린다.
자본주의 세계는 늘 불안하게 흔들린다는 특징이 있다. 떵떵거리는 지배자들로서는 변화가 적을수록 좋다. 한국의 외환위기 시절에도 소수의 부유층은 ‘이대로’를 외쳤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경쟁하며 변화해야 존속될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 성공은 ‘얼마나 더 많은 이윤을 얻었는가’로 가려지게 된다. 이익을 많이 남기려면 재료를 더 싸게 구하고 상품을 더 넓은 시장에 팔아야 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생산과 소비를 범세계적인 꼴로 만든다. 자본주의가 반드시 세계화로 치닫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어느 시대에나 늘어난 생산량은 축복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다르다. 과거에 풍년이 들면 농부들이 만세를 불렀지만 지금은 한숨을 내쉴 때가 더 많다. 기를 쓰고 쏟아낸 상품은 팔아야 이윤이 남는다. 하지만 팔리지 않는 상품은 고스란히 빚이 되어 돌아온다. 생산 능력이 좋아질수록 자본주의는 심한 불경기라 할 수 있는 ‘(경제)공황’에 빠져든다.
공황은 사회적 전염병과 같다. 공황을 견뎌내는 과정을 통해 점점 더 강한 자들만 살아남는다. 공황을 이겨내고 경제가 더 크게 자라면 불경기의 위협은 더 커다란 모습으로 다가온다. 자본주의는 사실 더 전면적이고 더 강력한 공황들을 준비하는 셈이다.
못 가진 자들은 어떻게 될까? 가진 자들은 굳이 돈을 더 들여가며 추가로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다.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취직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생활은 점점 더 쪼들리게 된다. 일할 수 있는 공장도 회사도 없는 사람들은 ‘자신을 조각내 팔아야 하는 존재’가 된다. 경쟁에서 밀린 상인들, 작은 땅 주인들도 점차 못 가진 자들로 전락해버린다. 그렇게 못 가진 자들, 프롤레타리아들은 경쟁이 치열해 질수록 더 많아진다.
프롤레타리아들은 가진 것이 없으니 잃을 것도 없다. 이들은 ‘투쟁으로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고,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라고 절규한다.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세상을 뒤엎어 소외된 사람들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외침이다. 세상은 두 젊은이의 외침에 열광했다.
하지만 20세기는 ‘공산당 선언’이 ‘공산당 선동’에 지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옛 소련 등 공산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사라진 상태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도 무늬만 마르크스주의일 뿐이며, 북한과 쿠바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추락해버렸다.
그렇지만 ‘공산당 선언’은 우리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고전이다. 그들이 지적한 세계화와 양극화는 지금도 자본주의가 고민하는 심각한 문제다. 자본주의는 달리는 자전거와 같다. 빠르게 달리지만 멈추면 바로 쓰러지기 때문이다. 위험을 알고 조심할 때와 모르고 질주할 때의 차이는 매우 크다. 자본주의는 항상 불안한 체제다. 경제를 건강하게 키우고 싶다면 ‘공산당 선언’의 지적을 뼈아프게 새겨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