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나 여름방학에 대형 서점에서 책을 읽는 초등학생을 흔히 볼 수 있다. 표정은 진지하고 자세도 똑바르다. 이들은 도대체 무슨 책을 읽고 있는 걸까. 학습만화가 많다. 초등학생에겐 학습 만화가 ‘인기 짱’이다. 2008년 상반기 어린이 책 베스트셀러 20위까지 학습만화가 14권을 차지해 전체의 70%에 이른다.(한국서점조합연합회 조사)
학부모는 만화에 푹 빠진 아이의 모습을 보면 ‘아이가 다른 책을 안 보면 어찌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린이문학 평론가 조월례 씨는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학습만화에 푹 빠지는 만화 독서기는 초등학교 2, 3학년 정도의 아이들이 누구나 한번쯤 거쳐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학습만화에서 글로만 된 책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은 ‘이유기’와 흡사하다. 밥을 잘 먹는 아이가 되려면 ‘젖병 떼기 이유기’를 제대로 거쳐야 하듯이 책을 잘 읽는 아이가 되려면 ‘학습만화 이유기’를 제대로 보내야 한다. 갓난아기가 젖병을 떼고 밥을 먹게 되는 과정이 ‘제1 이유기’라면, 초등학생이 학습만화를 떼고 글로만 된 책을 읽게 되는 과정은 ‘제2 이유기’인 셈이다.
○ 학습만화와 아름답게 헤어지기
학습만화 이유기는 자녀가 한창 만화에 빠져 있는 2, 3학년 때 시작해서 4학년 때 마무리 짓는 것이 좋다. 4학년 무렵이면 자녀의 관심사도 조금씩 넓어지고 학교 공부가 어려워져서 좀 더 깊이 있는 책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린이 독서교육 전문가 4인에게 ‘학습만화 이유기’를 슬기롭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들어봤다.
학습만화 이유기의 첫 단계는 자녀의 독서능력을 체크하는 일이다. 자녀가 독서능력이 떨어져서 학습만화만 편독하는 아이인지, 독서능력은 있는데 학습만화를 즐겨 읽는 아이인지 확인해야 한다. 독서능력이 부족한 아이는 글로만 된 책을 읽는 데 부담을 갖고 있다. 이런 아이에게는 단계적으로 책을 읽혀야 한다. 그림동화를 읽게 하다가 서서히 삽화가 많고 글씨가 큰 책, 글씨가 작은 책 순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다.
학습만화만 읽는 딸 때문에 독서클리닉을 찾았던 초등학교 1학년 김민지(가명) 양의 어머니는 딸이 독서능력이 부족해서 글로만 된 책을 못 읽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딸은 글자 수가 적은 그림동화를 읽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림동화는 어린 아이나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 어머니는 그림동화를 번번이 빼앗았다. 딸이 독서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안 김 양의 어머니는 딸이 그림동화를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딸은 점차 책을 좋아하게 됐다. 이처럼 학습만화에 길들여진 자녀에게 높은 수준의 책을 강요하면 자녀가 책 자체를 두려워하게 될 가능성도 있어 단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독서능력이 있지만 학습만화를 즐겨 보는 아이라면 관심 있는 주제의 책을 자녀에게 건네주면 좋다. 예컨대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좋아하는 아이에게는 ‘그리스 신화’나 ‘오디세우스의 방랑과 모험’ 같은 책을 읽도록 권해보자. 한국 신화, 중국 신화, 북유럽 신화 등으로 점차 폭을 넓혀 주는 것도 좋다.
학습만화 이유기에는 책을 고르고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전 과정에 부모가 참여해야 한다. 자녀와 함께 도서관이나 대형서점을 정기적으로 방문해보자. 책을 고를 때 학습만화 1권을 사면 다른 책도 1권을 산다는 식으로 미리 약속을 하면 좋다. 글로만 된 책을 끝까지 다 읽었을 때는 자신을 대견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최대한 칭찬해줘야 한다. 한 권씩 다 읽을 때마다 보상을 해 성취감을 맛볼 수 있게 하는 것도 좋다.
○ 학습만화 금단증상, 부작용을 막으려면
학습만화 이유기에 부모는 극단적인 말과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그 많던 학습만화가 몽땅 폐휴지 수거함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혹은 학교도서관에서 빌린 학습만화를 읽고 있는데 아버지가 “너 지금 만화책 보지? 그럴 시간 있으면 공부나 해!”라고 소리쳤다고 가정해보자.
자녀로선 기막히고 속상한 일이다. 이럴 때 아이는 학습만화를 끊는 대신 몰래몰래 읽기로 마음먹기 십상이다. 자신이 무시 받았다는 생각에 반발심을 갖거나 책 읽기 자체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부작용이 나타났다면 자녀와 차분히 대화를 시도해보자. 학습만화를 부정하기보다는 “학습만화는 쉽고, 재미있어서 네가 좋아할 만하다. 하지만 계속 그림으로 된 학습만화만 읽는다면 어휘력이나 상상력이 자라지 않는다”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 편이 좋다. 아예 학습만화라는 장르에만 집중하는 아이들이 있다. 이런 자녀들은 학습만화를 못 읽게 하면 아예 책 자체를 거부하거나 울고 떼쓰고 소리 지르는 등 강한 금단증상을 보인다. 이 경우 조금 기다려주는 여유도 필요하다. 자녀가 감정적으로 진정이 됐다면 대화를 통해 계획을 세워서 글이 많은 책의 비중을 차츰 높여가야 한다.
(도움말: 한복희 한국독서클리닉센터 원장 겸 충남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남미영 한국독서교육개발원장, 조월례 어린이문학 평론가, 이유미 한우리독서논술연구소 연구원)
‘젖병 떼기’ 이유기 VS ‘학습만화 떼기’ 이유기 | |
이유식을 묽은 죽에서 밥의 형태로 바꿔간다. | 학습만화→그림동화→삽화가 많고 글씨도 큰 책→ 작은 글씨로만 된 책 순으로 점차 바꿔간다. |
분유의 양을 조금씩 줄이고 이유식 먹는 횟수를 늘린다. | 학습만화의 비중을 조금씩 줄이고 글로만 된 책의 비중을 늘린다. |
편식하지 않는 올바른 식습관을 위해 영양을 균형 있게 공급한다. | 학습만화 1권을 사줄 때 다른 책도 1권 사주는 식으로 자녀가 학습만화만 읽지 않도록 한다. |
처음에는 부모가 이유식을 숟가락으로 떠먹이고 나중에 스스로 숟가락을 쥐도록 연습시킨다. | 처음에는 도서관이나 서점을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책을 함께 골라주고 나중에 스스로 고르도록 한다. |
젖병을 억지로 빼앗지 말아야 한다. | 만화책을 한꺼번에 내다버리지 말아야 한다. |
영양이 풍부하다고 아기가 소화하기 어려운 생우유 등을 먹이지 말아야 한다. | 곧바로 글로만 된 어려운 책을 읽으라고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
이유식을 잘 먹여야 ‘밥 잘 먹는 어린이’로 순조롭게 성장할 수 있다. | 그림동화 등 중간단계의 책을 잘 읽혀야 ‘책을 골고루 읽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다. |
최세미 기자 luckysem@donga.com
만화중심 → 글보다 그림많은 책 → 글로만 된 책
“만화 본다고 꾸짖지 말고 단계별로 지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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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만화 이유기를 순조롭게 넘기려면 먼저 아이의 취향인 학습만화를 인정해줘야 한다. 학습만화는 과학 한자 역사 등 딱딱한 지식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전달하기 때문에 가볍게 읽으면서 지적 호기심을 갖게 해준다. 인터넷이나 TV를 먼저 접해 글보다 그림이 친숙한 요즘 아이들에게는 학습만화는 책 읽기 ‘입문용’으로 적당하다.
하지만 학습만화만 계속 보면 자녀의 어휘력, 상상력이 자라지 않는다.
예컨대 ‘계백장군은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늠름한 걸음걸이로 준마에 올라 적진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는 책의 구절이 학습만화에선 ‘씽-’이라는 의성어 하나로 표현된다. 아이의 어휘력이 늘 턱이 없다. 상상력도 마찬가지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프로디테는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는 표현이 나온다면 아이는
그 미소가 어떨지를 상상하게 된다. 만화는 야릇한 미소를 짓는 여인의 그림이 있어서 굳이 상상할 필요가 없다. 독서나 글쓰기, 학교공부에 필요한 어휘와 상상력을 키우려면 적정한 때에 글로만 된 책을 읽어야 한다.
글로만 된 책으로 매끄럽게 옮겨가려면 학습만화를 먼저 읽고 이와 같은 주제의 책을 찾아 읽는 게 좋다. 자녀 옆에서 책을 골라주되 점차 그림은 줄이고 글은 늘리는 ‘3단계 지도법’을 실시해보자. ‘학습만화→글보다 그림이 많은 책→글로만 된 책’ 순으로 책을 읽히는 것이다. 자녀의 독서능력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초등 고학년 때부터는 주로 글로 된 책을 읽는 것이 좋다.
아이에게 확실한 동기부여를 하려면 아이가 즐겨 보는 학습만화를 눈여겨 봐뒀다가 그 학습만화의 주제와 동일한 책을 추천해주자. 이때 학교에서 하듯이 독서 기록장을 만들어보자. 종이에 나무를 그린 후 줄기 부분에는 학습만화의 책 제목을, 열매로는 동일한 주제로 읽은 글로 된 책 제목을 써넣게 하는 것이다. 나무 열매가 몇 개 이상 열렸으면 아이에게 평소 갖고 싶었던 것을 상으로 주자. 기간을 정해 함께 책을 읽다 보면 학습만화 이유기가 한층 즐거워질 것이다.
독서교육 전문업체인 한우리독서논술연구소로부터 학습만화와 이어서 읽을 글로 된 책을 각각 추천받았다(그래픽 참조). 학습만화는 올해 상반기 어린이 책 판매 순위 상위 20위 권 안에 든 책 5권과 현재까지 2000만 부 이상 판매된 스테디셀러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 신화’로 추렸다.
최세미 기자 luckyse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