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에선 영어 토론 ‘YES’ 초등학교는 더듬더듬 ‘ABC’

  • 입력 2008년 7월 5일 03시 04분


《“Can you remember everything? Now, Look at the screen.”

최근 서울 성북구 돈암초등학교 3학년 교실. 영어교과를 전담하는 박선하(29·여) 교사의 말에 30여 명의 학생이 일제히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5, 6명은 알아듣지 못한 듯 머뭇거렸고 아예 고개를 숙이는 학생도 보였다. 박 교사는 이들을 위해 짧은 영어 문장을 다시 한 번 우리말로 바꿔 말했다. 같은 시간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한 영어학원에선 원어민 교사의 지도에 따라 6세 아이 10여 명이 공룡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이 공룡은 이빨이 날카로워 고기를 좋아했을 거예요.” 아이들은 아직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않았지만 영어로 공룡의 생김새를 설명하고 생태를 추측하며 수준급의 토론을 벌였다.》

▽유치원 교재가 초등 교과서 앞서=초등학생이 처음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3학년 영어수업에서 학생 간 격차가 심각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유치원 교재가 초등학교 교과서보다 어려운 단어와 문장을 실어 취학 전 교육이 격차를 낳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교육개발원이 교육과학기술부의 정책연구과제로 최근 작성한 ‘유치원과 초등학교 영어교육과정 연계성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유치원에서 배우는 영어 단어와 문장이 초등학교 3, 4학년보다 두 배가량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이 유치원 10곳에서 사용하는 영어교재를 취합해 초등학교 3, 4학년 교과서와 비교한 결과 유치원 과정에서 배우는 어휘가 387∼431단어인 반면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어휘는 절반 수준인 188단어였다.

유치원 교재에는 3음절 이상 어휘가 6개였지만 초등 교과서에는 1개밖에 없었고, 주요 문장 가운데 4단어 이상이 유치원 교재에는 53개였지만 초등 교과서는 4개뿐이었다.

유치원 교재에는 ‘애벌레(cater-pillar)’ ‘무당벌레(ladybug)’ ‘엄청난(enormous)’ 등 다소 어려운 단어도 쓰였지만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없었다.

▽영어실력 격차 심각=현재 유치원에선 영어교육이 금지돼 있지만 방과 후 교육이나 위탁교육 등을 통해 1주일에 3, 4차례 영어를 가르치는 곳이 대부분이다.

반면 초등학교 3, 4학년은 매주 한 차례 듣기·말하기 수업을 받고, 5학년 때 처음 알파벳을 익히므로 취학 전 교육 여부에 따라 학생 간 격차가 크다.

돈암초교 권재웅(9) 군은 “영어로 된 DVD를 자막 없이 보는데 학교 수업은 쉬운 편”이라고 말했고, 같은 반 이모(9) 군은 “선생님의 발음이 어려워 잘 알아듣지 못한다”고 말했다.

박 교사는 “학생 간 차이가 커 어느 수준에서 수업을 진행할지가 큰 고민”이라며 “학교 간 격차도 크다”고 말했다.

▽수준에 맞는 영어수업 실시해야=이런 격차를 고려해 영어교육 방안을 재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구진은 “유치원 교재의 어휘와 문장은 이미 초등 3, 4학년 수준을 넘어섰다”며 “영어 수업을 1, 2학년으로 확대할 때 동영상 강의 등을 통해 수준에 맞는 영어학습시간을 보장해야 한다”고 밝혔다.

서울대 이병민(영어교육) 교수는 “국가 단위의 일률적인 교육과정을 고집하기보다 학교가 자율적으로 수준별 수업 등을 통해 격차를 보완해야 한다”며 “무리하게 1, 2학년에 영어수업을 도입할 경우 사교육이 더 늘 수도 있다”고 말했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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